책에서 중요한 건 내용만이 아니다. 책을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이 있음에도, 간단하게 다운받을 수 있는 e북이 있음에도 우리가 굳이 책을 사서 보는 걸 보면 말이다. 책에서 중요한 건 어쩌면 그 책이 나의 서재에 꽂혀있을 때 느껴지는 그 설렘과 뿌듯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책을 사고 또 모은다.

출처 – Phaidon 

유난히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책들이 있다. 일명 ‘아트북’이라고 불리는 책들. 아트북이란 ‘아트’를 다루는 책을 넘어 그 자체가 ‘아트(예술)’가 된 책을 말한다. 책에 담긴 내용이나 삽화뿐 아니라 책의 표지부터 편집 디자인까지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존재감을 뽐내는 책. 이런 아트북일수록 편집과 디자인을 책임지는 출판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어떨 때는 책의 저자보다 그 출판사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기도 한다.

Phaidon의 책들, 출처 – nolita home and beauty 

오늘 소개할 ‘Phaidon’이 그렇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Phaidon의 책에는 어김없이 책 표지 위아래로 Phaidon 로고가 큼직하게 들어간다. 심지어 어떤 책에는 Phaidon의 회사명과 로고가 금박, 형압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책을 읽는 독자가 Phaidon의 출판물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다. 그만큼 Phaidon이라는 이름이 이 책을 소장하는 독자들에게는 자부심이라는 방증일 터. 이제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아트북 출판사 Phaidon과 이곳의 책들을 만나보자. 기사를 다 읽고 Phaidon의 책을 간절히 소장하고 싶어진 나머지 본인의 얇은 지갑을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Phaidon의 로고
출처 – Phaidon
출처 – Phaidon

 

Phaidon Press

현재까지 출판한 책만 1500권 이상. 영국을 대표하는 아트북 출판사 Phaidon Press. 그 무구한 역사는 1923년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된다. 1923년, 역사‧미술책 출판사를 설립한 벨라 호로비츠 박사(Bela Horovitz)와 루드비히 골드 샤이더(Ludwig Goldscheider). 목표는 질 좋은 책을 저렴하게 만들어 파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그들의 첫 번째 책은 문학, 철학,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이름을 딴 Phaidon이라는 출판사 이름에 걸맞은 행보였다.

벨라 호로비츠 박사(Bela Horovitz)
루드비히 골드샤이더(Ludwig Goldscheider), 출처 – Phaidon

오랜 역사만큼이나 부침도 많았다. 1930년대 말에는 나치를 피해 영국 런던으로 회사를 옮겨야 했다. 1955년, 창립자인 호로비츠 박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시작으로 70~80년대에는 소유권이 여러 차례 바뀌는 시련도 겪었다. 다행히 1990년 기업가 리처드 슐래그먼(Richard Schlagman)이 Phaidon을 인수한 이후 Phaidon은 원래의 설립 목표인 저렴하고 질 좋은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로서의 명성을 되찾는다. 그 결과 런던과 뉴욕에 위치한 본사 이외에도 파리, 베를린, 마드리드, 밀라노, 도쿄에 사무실을 두고, 100여 개국에서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독일어로 책을 출판할 정도로 세계적인 출판사가 되었다.

기사를 쓰기 위해 Phaidon의 역사에 대해 열심히 조사를 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100년에 가까운 이 출판사의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Phaidon이 출판한 책을 한 권 소개하는 것만큼 Phaidon을 더 잘 보여주는 건 없을 텐데…. 그래서 소개해본다. Phaidon의 대표작 혹은 문제작.

 

<The Story of Art(서양미술사)>

E.H. 곰브리치|Phaidon|1950
<The Story of Art>의 럭셔리 에디션, 출처 – Phaidon 

Phaidon의 최고 히트작이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미술책. 미술사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이들의 입문서이자 미술사를 공부하는 이들의 바이블. 1950년 출간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는 전 세계적으로 700만 부 이상 팔리며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소설도 아닌 예술 서적으로서는 어마어마한 수치이자 앞으로도 쉽사리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E.H. 곰브리치(Ernst Gombrich), 출처 – Phaidon

이 역사적인 책의 시작은 이러했다. 1930년대, 대학에서 5년이나 공부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유대인이었던 곰브리치는 나치의 탄압에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간신히 얻은 일거리 중 하나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 책의 번역. 하지만 책을 읽어본 곰브리치는 책의 수준에 실망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쓰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6주 만에 완성한 것이 바로 <곰브리치의 세계사>. 이 책 역시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단순하고 평이하지만 쉽고 명쾌해서 이해가 쏙쏙 되는 곰브리치만의 해설이 그 성공 비결. 이 책을 눈여겨 보았던 Phaidon의 창립자 호로비츠 박사는 나치를 피해 런던으로 이주한 곰브리치를 만나 끈질긴 설득에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Phaidon과 곰브리치, 그리고 미술사의 운명을 바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1950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곰브리치의 <세계사>, 출처 – near.st 

곰브리치의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또한 학술용어를 최대한 배제한 단순하고 쉬운 해설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곰브리치는 이에 대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독자들을 내려다보며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러한 곰브리치의 의지는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였다.”는 <서양미술사> 서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저렴하고 질 좋은 책을 만들어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했던 Phaidon의 창립 목표와 누구나 쉽게 미술사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던 곰브리치의 집필 의도는 이렇듯 일맥상통한다. 그렇기에 그토록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한 것이겠지만.

출처 – atelierdyakova 

 

<The Silver Spoon(Il cucchiaio d’argento)>

클레리아 도노프리오|Phaidon|2005
출처 – 0black0acrylic 

이번에는 요리책이다. 일명 ‘이탈리아 요리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책, <실버 스푼(Silver Spoon)>. 530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2000여 가지의 레시피를 소개하는 이 책은 무려 1500페이지에 500여 컷의 사진으로 구성돼 있고, 그 존재감만큼이나 실제 무게와 크기도 엄청나다. 내용도 알차다. 오죽하면 고든 램지, 제나로 콘탈로, 마리오 마탈리 등 세계적인 셰프들이 입을 모아 이 책이야말로 “이탈리아 요리 애호가들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이자 “내 주방의 성경”이라 극찬하기까지 했을까.

출처 – Phaidon 

2005년, Phaidon의 편집국장인 에밀리아 테라니(Emilia Terragni)는 이탈리아어로 된 <일치아이오 다렌토(Il cucchiaio d’argento)>라는 요리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결혼 선물이자 어느 가정에나 있는 요리책. 1950년, 이탈리아의 디자인 및 건축전문지인 도무스가 처음 발간한 이래 단 한 번의 절판도 없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요리책이었다.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을 익히 알고 있던 Phaidon은 이 책을 <Silver Spoon>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내놓았는데, 역시나 내놓자마자 100만 부 이상이 팔리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처 - shoped

<실버 스푼(Silver Spoon)>의 성공 덕에 Phaidon은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로만 알려져 있던 출판사에서 요리책도 잘 만드는 출판사로 거듭나게 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실버 스푼>을 성공으로 이끈 Phaidon의 편집국장 테라니에게 ‘Phaidon 요리책의 여왕(Phaidon’s Queen of Cookbooks)’이라는 칭호까지 하사했다. 이 기세를 몰아 테라니는 세계적인 사진작가와 디자이너들과 함께 요리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Phaidon은 예술, 역사, 철학에 이어 요리책으로도 명성을 떨치게 된다. 과감한 편집디자인, 아기자기한 일러스트 혹은 생동감 있는 요리 사진으로,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보여주면서 말이다.

Phaidon의 요리책들, 출처 – cloudinary 
Phaidon의 요리책 <A Very Serious Cookbook>, 출처 – Phaidon
Phaidon의 요리책 <Cuba Cookbook>, 출처 – Phaidon
Phaidon의 요리책 <Spain the Cookbook>, 출처 – Phaidon
Phaidon의 책 <Where to Drink Beer>, 출처 – Phaidon 

 

<Made in North Korea>

니콜라스 보너(Nicholas Bonner)|Phaidon|2005
출처 – Phaidon

한국인으로서 놓칠 수 없는 책도 있다. 표지 색깔부터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Phaidon의 <Made in North Korea>가 바로 그것. 북한 일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제품 패키지, 배지, 영화 티켓, 포스터, 교통권, 도장 등 각종 그래픽 디자인이 책 한 권에 오롯이 담겨있다. 이 모든 것은 저자인 니콜라스 보너(Nicholas Bonner)가 북한을 여행하며 틈틈이 모아온 것들.

출처 – Phaidon 

저자인 니콜라스 보너는 영국에서 조경을 전공한 뒤 베이징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1990년대 초 우연히 북한 주민을 만나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게 되는데, 이 경험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 바로 ‘고려투어’라는 북한 여행사를 설립하게 된 것. 1993년 7명의 관광객을 이끌고 최초로 평양 여행을 다녀오며 여행사 업무를 개시한 이래 현재까지 2000명이 넘는 관광객을 매년 평양에 보내고 있다. 2001년에는 북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단다.

니콜라스 보너, 출처 – financial times 

북한 주민의 일상에 녹아 들어 있는 각종 디자인은 우리와 너무 달라서, 혹은 너무 비슷해서 우리의 마음을 끈다. 특히 한글을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북한만의 개성 강한 폰트도 눈을 뗄 수 없는 요소. 비싼 가격만큼이나 그 값어치를 하는 책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메인 이미지 <The Art Book>, 출처 – Phaidon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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