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시간 속에서, 흙을 보고 만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손으로 흙을 빚으며 오랜 인내를 요구하는 도예는, 현대인들에게는 조금 어색하고 긴 호흡이 필요한 행위다. 자연 재료인 흙을 다루는 일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일치시키는 행위라 믿는 배세진 도예가의 작업은 시간과 정성을 축적해온 작업물이다. 반복적인 노동과 지속적인 작업으로 무한한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배세진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보자.

배세진 도예가

배세진 작가는 일련번호를 새긴 작은 흙 조각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 붙여 도자 오브제를 만드는 도예가로, 10여 년 동안 같은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자신만의 작업관을 구축해왔다. 모든 작품에 붙는 동일한 제목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유래한다. 희곡에서 두 주인공은 고도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기다리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다. 그의 작업 역시 하나의 결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자연의 시간을 드러내는 것으로, 희곡과 닮아 있다.

256904-259111 / 29x29x29 / 2018
253328-254019, 203143-204165, 209360-210242 / 2017, 2018
224479-226202 / 25x11x22 / 2018

하나의 작품에는 약 2000개에서 3000개 정도의 흙 조각이 사용되며, 번호를 연속적으로 쌓아 나가다 보니 완성되 작업물ㅇ 반복적인 노동의 결과라는 것은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종종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온전히 작업에 집중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옛날 장인들이 ‘사발 하나에서 우주가 보인다’고 했던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작업은 마치 드넓은 땅에 나무를 한 그루씩 심어 거대한 숲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하나의 작품 속에서 흙 조각들이 쌓아온 시간과 한 명의 작가의 작품들이 쌓아온 시간은 하나의 굵은 서사를 가진다.

164209-166027 / 55x40x28 / 2017
70x70x53 / 2011
58x58x68 / 2009
100x100x19 / 2010

그는 자연의 시간과 일치된 작업을 통해 자연의 시간을 기록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끊임없는 반복행위는 초시간적 경험을 통해 연구자를 개인적 소외의 경험으로부터 극복하고 존재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시간을 기록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듯 기록했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며 관람자에게도 전달되는 것이라 믿는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자연의 시간에 조금 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

배세진 홈페이지

 
모든 사진 ©Bae Sejin 출처- Bae Sejin 인스타그램

 

Writer

낭만주의적 관찰자. 하나의 위대한 걸작보다는 정성이 담긴 사소한 것들의 힘을 믿는다.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있으며, 종종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물건을 만든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간, 예술로 삶을 가득 채우고자 한다.
박재성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