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빠르고 깔끔한 디지털 시대, 폴란드 일러스트레이터 요안나 콘세이요(Joanna Concejo)는 오로지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금방이라도 사각사각 연필 움직이는 소리나 후, 하고 지우개 가루 불어내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그림들, 언제부턴가 조금 느린 호흡을 갈망하게 된 우리를 한눈에 사로잡을 그림들을.

<Rapas De Famille>, 출처 - 요안나 콘세이요 블로그
<과자가게의 왕자님>, 출처 - 요안나 콘세이요 블로그

바깥 어딘가에 ‘도시’라는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깊고 외진 시골. 요안나 콘세이요는 그런 곳에서 자랐다. 나무가 빽빽한 숲과 호수가 세상의 전부인, 느리고 차분한 곳이었다. 열다섯 살에 도시로 나와 줄곧 프랑스에서 살게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돌아간 적 없지만 그곳에서 익힌 것들은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한때 벽지나 수첩이었던 낡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그의 그림에서는 아날로그만이 간직한 것들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출처 - 요안나 콘세이요 블로그
출처 - 요안나 콘세이요 블로그

오래된 흑백사진 같기도 하고 아직 덜 완성된 스케치 같기도 한 그림체로, 그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옷을 입힌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10년 만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첫 번째 그림책이자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회색빛 도시에서 모두가 잠든 밤마다 별을 만드는 노인의 이야기 <아무개 씨의 수상한 저녁>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무개 씨의 수상한 저녁>
<아무개 씨의 수상한 저녁>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이 스며든 이야기들은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한데 모아놓은 시(詩)처럼 오묘해진다. 이야기 속에서는 한창 저녁 식사가 진행 중인데 그림 속에서는 찻잔 위로 구름이 떠다니고 수프 접시에서 브로콜리가 자라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의 뱃속에서는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거실에는 현관문보다 커다란 새가 떡하니 서 있다.

<천사의 구두>
<천사의 구두>, 출처 - pinterest

그러나 시(詩)가 아름다운 건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자꾸만 입안에서 굴려보게 되기 때문 아닐까.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끝끝내 의미를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림들이라 더 오래 눈길이 머무르고 마음이 간다. 권위적인 아버지 앞에만 서면 주눅 드는 아들의 마음을 박제된 나비에서 읽어내기라도 한다면 이야기는 몇 배로 풍성해진다.

<잃어버린 영혼>, 출처 - 그림책 박물관
<잃어버린 영혼>

너무 빠르게 살다 뒤따라오던 영혼을 놓쳐버린 남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영혼>은 재미있게도 딸이 직접 벼룩시장에서 사 온 낡은 회계장부에 그린 것이다. 노르스름한 종이와 모서리마다 찍혀 있는 오래된 숫자 덕분일까, ‘영혼은 제 주인을 잃었단 걸 알지만, 사람들은 제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먼지 쌓인 다락방에서 우연히 찾아낸 이야기처럼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빨간 모자>
<빨간 모자>, 출처 - Topipittori
<Mi Madre>, ‘젊은 시절을 외딴 시골에서 보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린 작품이다. 출처 - 요안나 콘세이요 블로그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 속에 자신의 기억을 하나둘 숨겨놓는다. 푸릇푸릇한 잎사귀와 탐스러운 꽃송이,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풀이 자세를 바꾸는 들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민담 <빨간 모자>에도 빨간 모자의 할머니 대신 자신의 할머니를 앉혀 놓았고, 어릴 적 살았던 집에 걸려 있던 동물들의 얼굴을 그림 속 집에 걸어두었다. 그래서인지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책을 보고 있자면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는 기분이 든다.

그림들은 이렇게 노트에 차곡차곡 보관된 아이디어 스케치를 바탕으로 탄생한다

이 밖에도 요안나 콘세이요의 작품은 다양하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림책들부터 장면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그림들까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만의 속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

<빨간 모자>
<잃어버린 영혼>

누군가에게는 조금 느리고 뒤처져 보이는 방식이지만, 요안나 콘세이요는 스케치 하나하나에 자신의 영혼이 배어 있다고 믿는다. 그의 작품이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덕분 아닐까.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에는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그의 세계는 잠시 희미해지는 듯 보일지라도 결코 희미해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시대를 돌고 돌아 다시 우리 곁에 내려앉은 아날로그처럼.

 

 

요안나 콘세이요 홈페이지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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