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Romance>, 출처 L'ours et le singe
출처 - Gone-fishing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재능을 찾을 때가 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가의 꿈을 안고 찾은 미술학교에서 스크린프린트를 접한 것이다. 판자에 재료를 붙인 다음 한 장 한 장 인쇄하는, 섬세하고 이름조차 생소한 이 기법에 푹 빠진 그는 결국 일러스트레이션 대신 스크린프린트를 전공한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만의 색깔을 섞는다. 평범한 프랑스 청년 버나드 그레인저가 그래픽 천재라 불리는 일러스트레이터 블렉스볼렉스(Blexbolex)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출처 - Gone-fishing
그림책 <Ballad>, 출처 - picturebook makers

블렉스볼렉스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어렸을 적 가지고 놀던 도형 블록이 떠오른다. 통통 튀어 오를 듯 알록달록한 색감이며 자를 대고 그은 듯 깔끔한 선. 덕분에 다양한 풍경이 섞여 있어도 전혀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블렉스볼렉스 작품의 특징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추상적인 단어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림책 <Seasons>, 출처 - Index Grafik
그림책 <Seasons>, 출처 - Brain Pickings
<Solitude>

그는 주로 봄이나 여름, 고요, 행복 같은 단어들, 그러니까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추상적인 개념들에 형체를 부여한다. 별다른 설명은 따라붙지 않는다. 그저 대상의 이름만이 그림 옆에 함께 존재할 뿐이다.

그림책 <Seasons>, 출처 - Kinderbooks.net
출처 - Brain Pickings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대충 보고 빨리 넘길 수 없다. 대신 이 단어를 왜 이런 이미지로 풀어냈는지, 그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그림체만큼 단순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림 속 내용에 나름의 사유가 담겨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블렉스볼렉스의 그림에 빠져든다. 얕아 보여 방심했던 호수에 두 발이 푹 빠지듯이 말이다.

그림책 <Vacation>
그림책 <Vacation>, 출처 - express.fr
그림책 <Romance>, 출처 - Picturebook makers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 가지 방식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다. 그림책 <Vacation>과 <Romance>는 아기 코끼리와 함께 우주를 둥둥 떠다니며 휴가를 보내고, 숲속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는 등 신비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작품들 속 그림들은 밤하늘에 흩뿌려진 은하수나 지난밤의 꿈처럼 아련한 느낌을 풍기니, 또 다른 매력을 맛보고 싶을 때 찾아보아도 좋겠다.

그림책 <Seasons>, 출처 - The Atlantic
그림책 <No Man’s Land>

손가락 방향을 따라 휙휙 넘어가는 핸드폰 화면처럼 뭐든지 빠르게 접하고 잊어버리는 요즘, 그럴수록 오히려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들에 눈길이 간다. 블렉스볼렉스에게 주목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디지털 시대에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스크린프린트 기법을 사용하고, 가벼운 그림이 아니라 사유를 담은 작품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블렉스볼렉스다운 작품들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책 <Romance>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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