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을 봤다.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었다. 키키 키린은 감독의 여느 가족 영화에서와 다름없이 다정하면서도 현실감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허술함과 장난기를 탑재한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릴리 프랭키도 변함이 없었다. 아역배우들은 또 어떤가. <아무도 모른다>로부터 이어져 온 아역배우들의 사랑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어떤 배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던 그 얼굴. 그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던 그 순간,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기존 작품들을 모두 뛰어넘어버렸다. 대관절 저 배우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의문은 영화가 끝난 후 풀렸다. 배우의 이름은 안도 사쿠라. 낯선 이름이었다.

이미지 via ‘mymovies

유명 배우이자 감독인 오쿠다 에이지와 유명 에세이스트 안도 카즈의 둘째 딸. 감독 겸 배우 안도 모모코의 동생이자 연기파 배우 에모토 타스쿠의 부인. 안도 사쿠라는 일본 영화계에선 이미 잘 알려진 배우였다. 배우 집안 출신으로도 유명했지만 무엇보다 유전자는 어디 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더 유명했다. 그동안 수상한 여우주연상의 개수만해도 열 손가락이 넘을 정도. 그저 <어느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받기 전까지 그 이름이 대한해협을, 태평양을 건너지 못했을 뿐이다.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케이트 블란쳇은 <어느 가족>을 본 뒤 “앞으로 우리가 찍는 영화에 우는 장면이 있다면 안도 사쿠라를 흉내 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극찬했다. 이는 <어느 가족>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안도 사쿠라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살피다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만이 눈물 연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눈물을 터뜨리기도, 삼키기도, 훔치기도 한다. 때론 울지 않고도 운다. 안도 사쿠라가 보여주는 눈물 연기의 그 넓디넓은 스펙트럼을 보다 보면 케이트 블란쳇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앞으로 어떤 영화 속 어떤 배우가 눈물을 흘려도 안도 사쿠라의 아류로 느껴질지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여기 안도 사쿠라가 그동안 영화 속에서 흘려온 눈물들이 있다. 그의 눈물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마 그 눈물들은 어느새 마음속에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길 것이다.

 

<가족의 나라> 속 울부짖는 리애

かぞくのくに, Our Homeland ㅣ2012ㅣ감독 양영희ㅣ출연 안도 사쿠라, 아라타, 양익준

1970년대, 양영희 감독의 오빠들은 태어나 자란 일본에서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조국 ‘북한’으로 보내졌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 일할 일꾼으로 보내진 오빠들은 그 이후 다시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지상낙원’이라 믿고 간 북한에서 오빠들은 영양실조에 걸렸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식들이 북한에 인질로 잡힌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그 현실에 대해 한마디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결국 입을 연 것은 일본에 남겨진 유일한 딸 양영희 감독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의 힘을 빌려서였다.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 두 편의 다큐멘터리로 재일교포 북송 문제를 다룬 양영희 감독의 세 번째 영화는 극영화인 <가족의 나라>. 뺨에 생긴 종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일본에 돌아왔던 셋째 오빠가 귀국령이 떨어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북한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의 이야기를 담았다. 양영희 감독의 분신인 여동생 ‘리애’ 역을 안도 사쿠라가 맡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다림에 지친 무기력한 리애의 얼굴로 시작해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리애의 얼굴로 끝난다. 리애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은 고스란히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왜 양영희 감독의 세 번째 영화가 극영화여야 했는지 리애의 얼굴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리애가 안도 사쿠라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양영희 감독은 당시 느꼈던 울분을 더 가감없이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 리애는 오빠를 따라온 북한의 감시원에게 “나는 당신이 싫다. 당신의 나라도 싫다.”고 울부짖는다. 영화에 채 나오지 않은 그동안 리애가 겪었을 아픔은 그 외마디 외침만으로 모두 설명된다. 오빠에게 공작원을 제의받았을 때 리애는 울지 않으면서 운다. 그런 제안을 한 오빠에게 화가 나면서 동시에 그런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오빠가 불쌍한 리애의 양가적인 마음은 그렇게 스크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안도 사쿠라의 연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양영희 감독의 흔치 않은 경험담은 안도 사쿠라의 눈물 연기와 만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세상으로부터 가족을 지킬 수 없을 때 느끼는 그 무력감 말이다.

이 영화를 본 양 감독의 어머니는 “네 젊을 때를 쏙 닮았다. 어디서 그런 배우를 찾아왔노.”라고 말했다는데, 리애 역의 안도 사쿠라의 연기를 인정한 것은 사실 양 감독의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가족의 나라>로 안도 사쿠라가 키네마준보, 일본방송영화예술대상 등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쓴 것이다. “그간 안도 사쿠라는 늘 담배 피우고, 껌 좀 씹는 조연만 했었다. 그걸 보면서 이 배우가 자기 모습대로 바로 서서 연기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한 양영희 감독의 캐스팅은 적중한 셈이다.

<가족의 나라> 예고편

 

<쿄코와 슈이치의 경우> 속 눈물을 삼키는 쿄코

今日子と修一の場合, Case of Kyoko, Case of Shuichiㅣ2013ㅣ감독 오쿠다 에이지ㅣ출연 안도 사쿠라, 에모토 타스쿠, 와다 소코, 코시나 에나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8개월 후, 자원봉사를 위해 재해 지역을 방문한 오쿠다 에이지 감독은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다짐한다. 2007년 <아웃 오브 더 윈드>를 내놓은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촬영에 들어갔다. 둘째 딸 안도 사쿠라와 사위 에모토 타스쿠과 함께. 안도 사쿠라 입장에선 아버지가 감독하는 영화에 남편과 함께 연기를 한 셈이다. 재미있는 건 극 중에서 안도 사쿠라는 남편인 에모토 타스쿠와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각자의 연기가 묘하게 어울리면서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역시 부부는 부부다.

왼쪽부터 안도 사쿠라, 아버지 오쿠다 에이지, 남편 에모토 타스쿠. via ‘cinema café’ 

영화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조금의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주인공들을 절망의 끝으로 몰아넣는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건조하고 무기력한 얼굴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감내한다. 안도 사쿠라가 연기한 ‘쿄코’의 경우는 특히나 더 절망적이다. 병으로 쓰러진 남편을 대신해 보험설계사로 일하게 된 그는 영업실적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상사, 고객과 성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발각되어 하나뿐인 아들마저 빼앗긴 채 집에서 쫓겨난다. 혈혈단신 상경한 도쿄에서 성인업소의 스카우트 사원을 만나 동거를 하며 성매매 업소에 취직하는 등 쿄코는 나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음에도 표정에 큰 변화가 없다. 어딘가 텅 비어버린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던 그가 고향에 아들을 찾으러 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엄밀히 말하면 울음을 삼킨다. 그리고 그 눈물은 그동안의 건조하기 짝이 없던 표정들 사이로 또렷이 양각되어 두드러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 이 배우 제대로 울 줄 아는구나’하는 깨달음이 찾아옴과 함께 그를 따라 울 수밖에 없다.

오쿠다 에이지는 아마 안도 사쿠라의 연기를 보며 제대로 된 배우를 탄생시키고 발굴해냈다는 것에 뿌듯했을 것이다. 감독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말이다.

<쿄코와 슈이치의 경우> 예고편

 

<백엔의 사랑> 속 눈물을 터뜨리는 이치코

百円の恋, 100 Yen Loveㅣ2014ㅣ감독 타케 마사하루ㅣ출연 안도 사쿠라, 아라이 히로후미, 이나가와 미요코

여기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생이 있다.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초등학생 조카와 게임하는 게 다인 데다 걸핏하면 여동생하고 아침상을 뒤집어엎으며 싸운다. 걸음은 어기적어기적 둔하고,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에 옷이라곤 펑퍼짐한 추리닝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지만 현실에선 조연은커녕 엑스트라도 못 될 법한 인물. 안도 사쿠라가 연기하는 ‘이치코’다. 홧김에 독립을 선언한 그는 백엔샵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서기를 시작하지만 녹록지 않다. 치한을 만나고, 남자에게 차이고 인생은 꼬이기만 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안 좋아질 수 없던 순간, 복싱을 만나면서 그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백엔의 사랑>은 사실 이치코가 변화해가는 과정이 전부인 영화다. 그리고 그 과정으로부터 오는 카타르시스는 전부 안도 사쿠라의 연기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딱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었다며 엉엉 우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이치코가 겪은 변화를 관객은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까.

이 영화를 위해서 안도 사쿠라는 3개월 동안 복싱을 배웠다. 막판에는 프로 테스트 제의를 받을 정도까지 되었다. 마지막 경기 장면은 대역 없이 꼬박 이틀을 촬영했다. 이치코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살을 잔뜩 찌운 채 촬영을 시작해서 점점 근육질의 몸으로 바꿔나갔다. 여기서 놀라운 건 이 영화가 단 2주간 촬영되었다는 거다. 한마디로 루저 인생을 살다가 복싱을 배우고 대회에 나가는 등 영화 속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변화들을 여배우가 2주 만에 자신의 신체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연기에 있어서 육체가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는 안도 사쿠라의 인터뷰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백엔의 사랑> 예고편

 

<어느 가족> 속 눈물을 훔치는 노부요

万引き家族, Shopliftersㅣ2018ㅣ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ㅣ출연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마츠오카 마유, 키키 키린, 죠 카이리, 사사키 미유

<어느 가족>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보다 더 끈끈하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다. 안도 사쿠라는 그중에서 엄마 역할을 맡은 ‘노부요’를 연기한다.

안도 사쿠라가 아닌 노부요는 상상도 가지 않지만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처음부터 안도 사쿠라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안도 사쿠라와 길에서 마주친 것을 계기로 40대였던 노부요의 설정까지 바꿔가며 안도 사쿠라를 캐스팅한 것이다. 영화를 위해서나 감독을 위해서나 참으로 운명적인 마주침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이 작품이 안도 사쿠라가 출산 후 연기한 첫 작품이었던 터라 극 중 딸인 ‘유리'(사사키 미유)에 대해 더욱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쯤 되면 타이밍도 참 운명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장면은 케이트 블란쳇도 언급했듯 취조실의 노부요 클로즈업. 아이들이 뭐라고 불렀냐는 형사의 질문에 “글쎄요, 뭐라고 불렀을까요?”라고 말하며 손등으로 땀을 훔치듯 눈물을 훔치는 안도 사쿠라의 정면 클로즈업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미있는 건 사실 이 장면은 안도 사쿠라에게 형사가 어떤 질문을 하게 될지 알려주지 않고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다큐멘터리 같은 스타일을 도입한 상태에서 13분 정도 길게 카메라를 가져가면서 촬영을 한 것. 안도 사쿠라가 노부요와 완전히 일체된 순간이라고나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안도 사쿠라의 클로즈업을 찍고 “아, 뭔가 특별한 게 찍혔구나 전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전율은 영화를 보던 관객에게도 틀림없이 전해진다.

<어느 가족> 예고편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ANSO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