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무르익는 걸 보며 매미 소리, 수박, 바다 등을 떠올리다가, 생각의 마지막엔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과 마주한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여름이 배경인 장면이 많다. 작품마다 각기 다른 사연으로 성장통을 겪는 인물들은, 어쩌면 삶의 계절 중에서 가장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겪는 성장통처럼 러닝타임 내내 작품 속 인물과 함께 뜨겁게 달리다가, 일상으로 돌아와서 영화의 여운을 곱씹으면 찬란한 여름 풍경이 떠오른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2006

고교생인 ‘마코토’는 우연한 계기로 타임리프를 할 수 있게 된다. 타임리프로 과거로 돌아가서 쪽지시험 점수를 높이고, 노래방 시간을 늘리는 등 일상의 즐거움을 늘려나간다. 그러던 중 절친한 친구인 ‘치아키’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피하려고 시간을 돌리면서 모든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돌아보게 된다.

누구나 한 번쯤은 타임리프로 과거에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마코토도 운이 나쁜 날에 과거로 돌아가길 꿈꿨고 자유롭게 시간을 오갈 수 있게 된다. 막상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서 하는 선택에 따라 많은 게 바뀌는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선택에 큰 무게감을 느낀다.
더 이상 타임리프를 하지 못하는 일상으로 돌아온 마코토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마다 솔직함을 추구한다. 많은 생각을 하기엔 시간이 짧고, 자신의 마음이 내는 소리를 따라가는 게 가장 현명한 것임을 느꼈을 테니까. 마코토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로 돌아가는 여정 내내 훌쩍 더 성장해서 자신을 위한 미래에 더 가까워진 듯 보인다.

 

 

<썸머워즈>

サマーウォーズ, Summer Wars|2009

수학에 특출난 재능이 있지만 그 외에는 별 자신이 없는 소년 ‘겐지’. 겐지는 짝사랑하는 선배 ‘나츠키’의 부탁으로 그의 대가족과 며칠을 함께 보내게 된다. 이때 일본인의 일상을 좌지우지할 만큼 깊게 관여된 거대플랫폼 ‘OZ’가 해킹당하고, ‘OZ’의 보안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겐지도 하루아침에 사건에 연루되면서 혼란을 겪는다.

집에 혼자 있는 게 익숙한 겐지에게 나츠키의 대가족은 보기만 해도 따뜻한 집단이다. ‘OZ’ 해킹 사건을 해결할 때도 겐지는 나츠키의 가족들과 함께 연대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해킹당한 ‘OZ’와 싸울 때도 겐지는 자신의 재능인 수학으로, 나츠키는 특기인 고스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등,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려움에 맞선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겐지는 나츠키의 가족들과 지내는 며칠 동안 사람들과 연대하는 법,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법을 몸으로 배운다. 제목처럼 전쟁 같은 여름을 치른 겐지. 아마 겐지에겐 평생의 자양분이 될 잊지 못할 여름이 아니었을까.

 

 

<늑대아이>

おおかみこどもの雨と雪, Wolf Children|2012

‘하나’는 홀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바쁘게 사는 대학생이다. 우연히 강의실에서 청강 중인 이와 사랑에 빠지는데, 알고 보니 그는 늑대인간. 그럼에도 하나는 사랑하는 그와 함께 딸 ‘유키’와 아들 ‘아메’를 낳아서 기른다. 행복을 꿈꾸던 하나는 갑작스럽게 남편의 죽음을 접하고, 학교도 포기하고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산다. 늑대이자 인간인 아이들의 생활을 위해 귀농하고, 서서히 그곳 생활에 적응해가는 동안 유키와 아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한다.

하나의 태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늑대’이자 ‘인간’인 유키와 아메에게 삶의 선택권을 준다는 거다. 늑대의 본성을 숨기고 인간으로 자신의 곁에 남아달라는 요구 대신, 아이들이 자연과 인간 모두와 교류해보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이 늑대인간과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이 불가항력이었던 것처럼, 아이들의 삶도 자신만의 방향으로 흘러갈 때 행복할 것임을 몸으로 느낄 테니까.
성장이란 어제보다 한 뼘 자랐음을 뜻하지만, 그 성장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에 대해 함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순 없다. 누군가가 타인의 성장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늑대아이’ 속 하나의 태도가 답이 되어줄 거라고 말하겠다.

 

 

<괴물의 아이>

バケモノの子, The Boy and The Beast |2015

엄마가 죽은 뒤 친척들로부터 도망쳐 거리를 배회하는 소년 ‘렌’. 렌은 우연히 괴물 ‘쿠마테츠’와 마주치고 괴물들이 사는 세상에 진입한다. 마침 제자를 구하던 쿠마테츠는 갈 곳 없던 렌을 데려와서 ‘큐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둘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처음에 갈등하던 둘은 점점 가까워지다가 어느새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성장은 늘 쌍방이다. 큐마테츠와 큐타는 스승과 제자 관계이지만 계속해서 함께 성장한다. 독불장군인 쿠마테츠는 큐타를 가르치면서 소통하는 법을 깨닫고, 큐타는 유년기의 따뜻한 추억을 쿠마테츠와 함께 채워나간다. 큐타에게 쿠마테츠와 보낸 시간은 어두운 내면에 함몰되지 않고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무기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마음 안에 어둠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이지 않는 건, 서로의 어둠을 채워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서가 아닐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