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Muse)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로부터 시작한다. 제우스와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여신은 미술, 음악, 문학 등의 광범위한 지적 활동을 도맡았다. 뮤즈들은 이들의 도움을 열망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러한 신화에 의해 뮤즈는 시인, 무용가, 음악가,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미술관(museum)과 음악(music)의 어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유경희, <예술가와 뮤즈>(2003), 아트북스)

자크 스텔라, <뮤즈들의 숲에 있는 미네르바>, 17세기경

인류가 남긴 문화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복수의 예술가들에게는 흔히 뮤즈라 일컬어지던 대상이 이들의 삶에 함께했다. 신화적 의미에서 비롯된 바와 마찬가지로, 뮤즈는 주로 남성 예술가에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은 여성들이었다. 시대적 한계에 따라 뮤즈는 곧잘 어느 예술가의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의 재능은 정작 빛을 보지 못하기도 했고, 이들 개인의 삶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막강한 존재감을 발하며 창작자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하나의 전설로 남아버린, 뮤즈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해 그들에 헌사를 바친 영화 몇 편을 소개한다.

 

<팩토리 걸>(2006)
에디 세즈윅 – 앤디 워홀

(왼쪽 가운데) 앤디 워홀, 에디 세즈윅

앤디 워홀 팩토리의 황금기로 평가되는 1968년까지의 ‘실버 팩토리’의 중심엔 에디 세즈윅이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우울증, 아버지의 성적 학대, 형제들의 자살과 사고사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에디 세즈윅은 앤디 워홀의 뮤즈가 되며 다수의 예술작품에 영혼을 실어주었다. 깡마른 몸매에 기하학적인 원피스와 하이힐, 화려한 귀걸이를 매치한 글래머러스한 스타일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에디 세즈윅은 60년대를 풍미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앤디 워홀과 창조적으로 교감하며 영혼의 동반자 역할을 했지만, 훗날 세간은 그를 워홀의 팩토리를 위해 자금을 대던 가여운 ‘팩토리 걸’로 기억하기에 이른다. 앤디 워홀이 또 다른 뮤즈에 관심을 뺏긴 동안 에디는 록스타(밥 딜런으로 추정)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술과 마약에 빠져 28의 나이에 이른 생을 마감한다.

<팩토리 걸> 스틸컷

<팩토리 걸>은 현대 미술의 판도를 바꾼 팝 아트 예술가 앤디 워홀의 유명에 가려진 그의 민낯을 포착하고, 한때 앤디 워홀의 예술 활동에 날개를 달아 주었던 뮤즈 에디 세즈윅의 불운한 삶을 조명한다. 대담하고 거침없는, 자유분방한 방랑자의 이미지의 뒤편엔 어딘가 위태로움이 함께하는 듯했던 에디는 앤디 워홀과 함께하며,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던 동시에 다시 끝없는 절망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 <팩토리 걸>은 영화적 의미보다는 재현의 역할에 다가서며, 에디 세즈윅 인생의 가장 꼭대기부터 소멸에 이르는 단면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에디가 가진 퇴폐적 이미지가 부각된 시에나 밀러가 그 역할을 담당했으며, 가이 피어스는 앤디 워홀의 외모뿐 아닌 제스처와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복사해냈다는 평을 들었다.

<팩토리 걸> 트레일러

 

<까미유 끌로델>(2013)
까미유 끌로델 – 오귀스트 로댕

오귀스트 로댕(좌), 까미유 끌로델(우)

까미유 끌로델의 재능을 알아본 유명 조각가 알프레드 부쉐는 그를 당대 최고의 조각가 로댕에게 소개했고, 끌로델은 로댕의 조수로 일을 시작한다. 당시 그의 나이 열아홉, 로댕의 나이는 마흔셋이었다.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조각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공유하며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로즈 뵈레(좌), 오귀스트 로댕(우)

그러나 로댕 곁에는 이미 3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해온 연인 로즈 뵈레가 있었다. 로댕은 끝내 영혼의 반려자였던 끌로델을 포기하고 충성스러운 헌신을 보여준 로즈 뵈레에게 돌아간다. 이별을 맞이한 끌로델은 그 슬픔을 창작에 쏟아부어 작품으로 승화시키지만 여성으로서의 제약, 로댕의 방해로 작업실에 은둔하게 된다. 든든한 지원군이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편집증세는 극에 달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채로 30년의 여생을 보낸다.

<까미유 끌로델> 스틸컷

철학적 주제들을 집요하고 독창적으로 파고들던 브루노 뒤몽의 <까미유 끌로델>은 정신병원에 수감된 까미유 끌로델의 삶의 일부분을 영화에 데려온다.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까미유 끌로델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체화한 그의 연기는 단 몇 분 만에 관객들을 끌로델의 인생 속 절망 한 자락을 체감케 한다. 계속해서 병원 바깥의 세상을 갈망한 절규를 보내는 끌로델의 내면에 이는 동요와 함께 이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안일한 시선들이 교차되며 그의 비통한 삶을 심리적으로 더욱 옥죈다. 한 천재 예술가의 가장 불행했던 며칠을 줄리엣 비노쉬의 빛나는 연기로 채웠다.

<까미유 끌로델> 트레일러

 

<토탈 이클립스>(1995)
아르튀르 랭보 – 폴 베를렌느

폴 베를렌느(좌), 아르튀르 랭보(우)

파리의 성공한 시인 베를렌느는 16세 소년 랭보가 보낸 주옥같은 8편의 시에 경탄한다. 시대의 반항아 랭보의 천재적인 면을 알아본 베를렌느는 그에게 단번에 사로잡힌다. 막 결혼해 신혼살림을 꾸리던 그는 가정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향은 판이했다. 상충된 세계관의 다툼 끝에 랭보는 베를렌느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흥분한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총을 쏘고 만다. 이로 인해 베를렌느는 남색 혐의로 감옥에 가게 되고 출감 이후엔 술에 찌든 채 사창가를 전전한다.

<토탈 이클립스> 스틸컷

이후 랭보는 20세의 나이에 절필을 선언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미 그가 남긴 시들은 파리에서 반향을 일으켰고 랭보는 대스타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누군가 랭보에게 과거의 글에 대해 물었을 때는 “모두 헛소리이자 거짓말이었다”는 식의 일갈을 하곤 했다. 랭보는 여전히 진실을 찾아 헤맸지만 여행 중에 얻은 다리의 병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의 나이 37세로 사망에 이른다. 베를렌느는 랭보가 죽은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토탈 이클립스> 스틸컷

진실을 좇아 물음을 던지던 젊은 랭보는 이미 관습과 거짓에 물든 베를렌느를 끊임없이 조롱했다. 그러나 정작 보호자이자 연인이던 베를렌느가 화가나 그를 떠나려 하면 랭보는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인생을 잠식하고 있었고, 그건 특히 베를렌느의 불안에 더욱 크게 불씨를 지폈다. <토탈 이클립스>가 이들의 삶을 얼마만큼 사실적으로 다루었는지를 판가름하긴 힘들지만, 뮤즈였던 랭보의 천재성과 과감성에 번번이 제압당했던 베를렌느를 보자면 랭보는 뮤즈라는 그릇에 담기기엔 벅찬 존재였다. 21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토탈 이클립스>를 통해 반항과 방랑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됐다.

<토탈 이클립스>의 한 장면

 

메인 이미지 <토탈 이클립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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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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