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음악은 우리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마음에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때때로 음악이 현실의 낯익은 장면과 마주할 때보다 마치 꿈이나 상상에서나 볼 법한 이미지들과 만날 때 우리는 더 깊은 감흥과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 제90호 아카데미상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 주제가상을 휩쓴 <코코>를 비롯해 <치코와 리타>, <피아노의 숲>까지, 여기 음악과 애니메이션의 운명적 만남을 주선한 꿈의 세계가 있다. 여기서 꿈은 곧 이루고 싶은 현실 속 목표와 이상이자 현실 밖 환상으로서의 중의적 꿈이다.

 

<코코>

Coco | 2018 | 감독 리 언크리치 |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벤저민 브랫, 레네 빅터, 안소니 곤잘레스, 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
<코코> 스틸컷

<코코>는 풍부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비주얼로 빚어낸, 그야말로 ‘오늘’의 꿈의 세계를 그린다. 뮤지션을 꿈꾸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엄격한 가풍에 의해 음악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소년 미구엘이 우연히 사후세계에 들어서는 모험을 하게 되면서, 상처 입은 현재를 이겨내는 이면의 환상과 현실의 행복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이다.

<모아나>(2016)에 이어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그리고 픽사 장편애니메이션으로서는 최초로 백인 아닌 주인공을 내세운 <코코>는, 우리에게 다소 익숙지 않은 멕시코와 히스패닉 문화 배경의 시청각을 통해 신선한 호기심과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이야기의 줄거리 배경을 소개하는 형형색색의 종이 장식은 멕시코 민속예술 파펠 피카도(Papel picado)에서 차용했고, 영화음악의 주를 이루는 밝고 화려한 핑거스타일의 라틴 기타팝은 2017년을 강타한 ‘Despasito(데스파시토)’를 떠올리게 한다.

Anthony Gonzalez, Gael García Bernal ‘Un Poco Loco(포코 로코)’
<코코> 공식 클립영상

<코코>의 이색적인 비주얼과 신나는 음악을 버무리는 것은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들이다. 감독 리 언크리치는 공동연출을 맡았던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는 물론 첫 단독연출을 맡았던 <토이 스토리3>(2010)에서도 놓지 않았던 가족주의, 공동체주의를 여기서도 고스란히 껴안는다. 다행인 것은 모계 대가족사회가 <코코> 줄거리의 배경이 되다 보니 이 같은 동어반복이 진부하지만은 않다. 게다가 미구엘이 가족과 저울질 해야 했던 개인의 꿈(비전)이라는 낯 뜨거운 당위 역시, 음악의 밝고 건강의 기치 아래 소년과 가족의 동반 성장을 통해 자연스러운 현재진행형의 주제로 변화된다.

Miguel ‘Remember Me (feat. Natalia Lafourcade)’ <코코> 뮤직비디오

 

<치코와 리타>

Chico & Rita | 2012 | 감독 하비에르 마리스칼, 페르난도 트루에바, 토노 에란도 | 출연 리마나 메네세스, 에마르 조오나, 에스트렐라 모렌테, 마리오 구에라, 블랑카 로사 블랑코
<치코와 리타> 스틸컷

<치코와 리타>를 통해 우리는 달고 씁쓸한 ‘지난’ 사랑의 꿈을 꾼다. 영화는 현재 시점에서 노인이 된 치코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과거 두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회상에 잠기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치코와 리타의 첫 만남에서부터 치코의 여성 편력으로 인한 오해와 반복되는 이별까지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가 농염한 라틴재즈와 선명한 수채화의 색감 사이로 절절히 스며든다.

<치코와 리타> 트레일러

<치코와 리타>는 <아름다운 시절>(1992)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스페인 감독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2013년 별세한 쿠바의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베보 발데스가 함께했다. 두 사람의 훌륭한 연출 덕분인지 영화는 음악이 줄거리 곳곳을 메우고 떠받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결코 거북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치코와 리타가 처음 만났을 때 리타가 불렀던 세계적인 라틴 팝 넘버 ‘베사메 무초(Besame Mucho’, 치코의 (영화 과거 시점 당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즉흥 비밥 연주, 리타의 룸바(rumba) 춤, 두 사람의 열정적인 볼레로(bolero) 등이 시종일관 영화와 같은 리듬과 아픔으로 심장을 요동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코비를 디자인한 스페인 출신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그림들은 매혹적인 색과 절제된 투명감으로, 우리를 치코의 선명한 꿈속으로 데려간다. 과거 시점 쿠바가 미국의 지배 아래 충실한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해 향락의 도시가 된 당대의 시간적, 장소적 배경과 주인공 두 사람의 다소 통속적일지언정 애틋한 사연이 <치코와 리타>만의 지나간 꿈을 완성하는 것이다. 뉴욕 무대를 소망했던 치코와 리타가 실제로 뉴욕에서 마주한 장면, 앞날에 대한 계획을 묻는 치코의 물음에 리타가 “내가 원하는 건 모두 과거에 있다.”고 답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한 지나간 사랑의 하모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치코와 리타> 스틸컷

 

<피아노의 숲>

ピアノの森 | 2008 | 감독 코지마 마사유키 | 출연 카미키 류노스케, 우에토 아야, 후쿠다 마유코, 미야시코 히로유키, 이케와키 치즈루
<피아노의 숲> 스틸컷, 카이(왼쪽)와 슈우헤이(오른쪽)

<피아노의 숲>은 두 천재 소년의 ‘내일’의 꿈을 그린다. 할머니 병 완을 위해 시골로 오게 된 슈우헤이는, 전학 온 자신을 괴롭히는 동급생들에게서 숲속 신비로운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마을 어귀 커다란 숲속에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오지 않고 도리어 귀신이 나온다는 의문의 피아노, 이른바 ‘숲의 피아노’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나타난 카이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피아노의 숲> 예고편

이시키 마코토의 동명 만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은 원작의 도입 부분에 해당하는 줄거리를 보여주며 주인공 두 사람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유명 피아니스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영재교육을 받으며 피아노가 험난한 숙제이자 적이었던 슈우헤이.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피아노 한번 배워본 적 없지만 천부적인 재능으로 피아노가 장난감이었던 카이. 너무도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은 오로지 피아노 연주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급격히 가까워지지만 한편으로 그 다름 때문에 묘한 경쟁의식을 낳기도 한다.

<피아노의 숲>이 빛나는 것은 원작 만화 속에서 상상에 그쳐야 했던 카이와 슈우헤이, 그리고 카이의 스승인 아지노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가 현실로 펼쳐지기 때문. 특히 주인공 카이의 연주는 섬세하고 풍부한 뉘앙스의 연주로 정평이 난 슬라브계 아이슬란드 국적의 천재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맡아 모차르트와 쇼팽 연주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의 매력이 더욱 살아난다. 초록빛 가득한 숲속 피아노에 밝고 화사한 빛이 스며들고 그로부터 생동하는 연주가 흘러나오는 아름답고 우아한 장면은 이 작품의 이야기만이 써나갈 수 있는 생생한 꿈의 장면이다.

<피아노의 숲> 포스터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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