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거장 중 한 사람이자 제니퍼 로렌스의 전 연인이었던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블랙 스완>(2010)이나 <노아>(2014), <더 레슬러>(2008) 등이 아닌 비교적 덜 알려진 초기작 세 편을 통해 주제와 장르 불문 집착의 광기를 예술적으로 그려내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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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촬영현장 스틸컷.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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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포스터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영화와 사회인류학을, AFI(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영화 디렉팅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재자였다. 학부에서 졸업과제로 완성한 단편영화 <수퍼마켓 싹쓸이>(Supermarket Sweep, 1991)로 몇 개의 영화상을 받으면서 일찌감치 재능을 보인 바 있다. 그래서인지 메가폰을 잡은 첫 장편영화 <파이>(1998)의 제작방식도 남달랐다. “100달러를 투자하면 150달러로 불려주겠다”며 순수하게 친구와 친지들로부터만 제작비 6만 달러를 모은 것이다. 그렇게 만든 저예산 데뷔작이 한 영화사에 무려 100만 달러에 팔리면서 그의 이름은 시장에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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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스틸컷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각본과 연출을 동시에 맡은 <파이>는 숫자의 패턴에 집착하는 천재 수학자 맥스 코헨이 우연히 알게 된 216자리 숫자를 두고 극심한 내적 혼란과 괴상한 외적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다. 수학이라는 설정이 유대인이라는 감독의 출신에서 비롯된 종교적 신비주의와 맞물리는 점은 이후 작품 <노아>를, 1인칭 시점의 광기 어린 집착은 <블랙 스완>을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대런이 처음부터 현란한 편집에 공을 들이는 장인 정신으로 무장해 있었다는 점이다.

<파이> 예고편

배트맨 만화의 원작자 프랭크 밀러의 흑백 작품 <씬 시티>(Sin City, 2005) 스타일이 원용된 거친 질감의 흑백 필름과 클로즈업을 반복하는 개성 넘치는 컷, 빠른 편집으로 만들어낸 독특한 리듬의 힙합 몽타주를 통해 <파이>는 주인공의 정신적 착란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위 긴박감을 더하는 테크노, 트립합 음악들은 대런이 단지 철학적이고 난해한 예술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그만의 미학을 관철하고 완성하고자 했음을 알게 한다. 한편으로 데뷔작다운 치기로 비치기도 하지만 분명한 감각적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 이 영화는 그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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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포스터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브루클린의 어둡고 암울한 이미지에 대한 천착과 관객의 감각과 감성을 교묘히 주무르는 대런의 재능은 차기작 <레퀴엠>에서 만개한다. 스토리는 역시 단순하다. TV 쇼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인 미망인 ‘사라’(엘렌 버스틴)가 태피(Tappy)쇼에 출연하라는 통보를 받고 다이어트를 시도하다가 약에 중독되는 줄거리와 사라의 아들인 ‘해리’(자레드 레토)와 그의 애인인 ‘마리온’(제니퍼 코넬리)이 돈에 대한 욕심으로 마약을 직접 판매하다가 그에 중독되어 파멸에 이르는 줄거리가 몽환적으로 교차한다. (마리온 역의 제니퍼 코넬리는 최근 공개한 넷플릭스 드라마 <설국열차>의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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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스틸컷

대신 화면과 음악의 자유로운 리듬과 템포, 과감한 시간 생략과 화면분할, 깊이 있는 색감, 비극적인 상황에서의 유도동기적인 음악 활용 등 앞서 데뷔작 <파이>에서 선보였던 대런의 화려한 편집기술은 더욱 눈부시게 발전한다. 덕분에 두 영화를 공통으로 관통하는 인간의 정신적 유약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강박적 광기, 궁극적으로 초래되는 불행과 파멸의 모습은 훨씬 충격적인 모습과 정서로 관객에게 후유증을 남긴다.

<레퀴엠> 예고편

대런이 <레퀴엠> 원작자 허버트 셀비 주니어가 쓴 분절적인 내용의 소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 감동하며 성장했다는 뒷이야기를 듣고 나면, 현실과 맞닿은 영화적 공간을 마치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그것처럼 아예 새롭게 재구성하는 <레퀴엠>의 격식 없는 컷 분할과 자유로운 리듬이 다소 이해가 된다. 이후 <파이>와 <레퀴엠>에서 보인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암울한 세계관과 감각적 연출을 눈여겨본 워너 브라더스는 그에게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의 각본과 연출을 제안하지만 이는 불발에 그친다. 만일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배트맨’이 완성되었다면 우리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대신 완전히 또 다른 브루스 웨인이나 조커를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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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흐르는 사랑> 포스터

<레퀴엠> 이후 무려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영화 <천년을 흐르는 사랑>의 원제는 ‘The Fountain(샘)’이다. 극 중 주인공 ‘이지 크레오’(레이첼 와이즈)가 집필하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데, 국내에서는 다소 추상적인 원제 대신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본 제목으로 대체되었다. 줄거리는 실제로 1,000년을 넘나드는 장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16세기 스페인과 21세기 현대, 26세기 우주의 한 공간 속에서 각각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마치 국내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를 연상시키듯 천년수를 둘러싼 전혀 다른 시공간 속 세 개의 로맨스가 하나의 스토리처럼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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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흐르는 사랑> 스틸컷

1,000년을 초월하여 매 순간 남자는 여인을 사랑하고, 그때마다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여인의 삶을 지상에 붙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대런의 전작들과 비교해 집착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지만, 편집의 주요한 방법으로 활용했던 쇼트의 패턴화를 이야기 전개로 다루는 데 차용했다거나 짙은 암흑의 영상미를 눈부신 빛의 영상미로 대체했다는 생각도 든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 예고편

일말의 이면적인 해석 여지만을 남겼던 전작 두 편의 비극적 결말을 분명한 구원으로 대체했다는 점, 종교적 상징을 차용한 감독의 철학을 영화의 훨씬 노골적인 주제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별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긴 시간을 두고 나온 세 번째 장편이자 당시로써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에게 있어 가장 많은 예산을 들일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지만, 제작 전에는 캐스팅이 번복되고 예산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수난을 겪어야 했고 제작 이후에는 평단과 대중 양측 모두에게 외면을 받았다. 그런데도 이후 그가 8년이나 걸려 다시 도전한 블록버스터가 또다시 종교적인 소재인 <노아>였던 것을 보면 대런의 초지일관하는 성향을 능히 짐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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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포스터

<천년을 흐르는 사랑>의 실패 아닌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후 알다시피 승승장구했다. <더 레슬러>(2008)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으며 <블랙 스완>(2010)은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아카데미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분명한 것은 대런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근래의 작품들이 그의 초기작 스타일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험적인 편집과 영상미학, 집착의 광기가 투영된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와 그 가운데 발생하는 종교적 구원 등은 앞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을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일 것이다.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기술과 과학에 발맞추어 자기만의 미학 전통을 진화시켜 가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들을 지켜보는 것은 앞으로도 크나큰 즐거움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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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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