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풍미한 재즈텟(The Jazztet)의 아트 파머와 베니 골슨

지금부터 20여 년 전인 1997년, 가수 헬렌 메릴(Helen Merrill)과 함께 내한하여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공연한 트럼펫 거장 아트 파머(Art Farmer, 1928~1999)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말수가 적고 하루 4~5시간 방에 틀어박혀 연습에 몰두한 연습벌레였다. 베니 골슨(S), 빌 에반스(P)와 함께 한 명반 <Modern Art>(1958)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어진 베니 골슨과의 재즈텟(The Jazztet) 활동으로 정상급의 트럼펫 연주자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당시 정상의 트럼펫 연주자들인 리 모건, 클리포드 브라운, 케니 도햄, 프레디 허버드 등과는 확실히 차별화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깊고, 부드럽고, 온화한 소리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명반 <Modern Art>(1958) 중 트럼펫으로 연주한 트랙 ‘Like Someone in Love’

남학생은 트럼펫을 선호하고 여학생은 플라리넷을 선호한다는 미국의 어느 조사 결과가 말해주듯이 트럼펫은 남성적인 악기다. 오랜 옛날부터 군대에서 신호용으로 사용된 악기이기도 하고, 연주할 때 입술 모양이 보기 흉해 여성들은 선호하지 않았다. 1940년대 들어 비밥이 대세가 되며 트럼펫은 인기 악기가 되었고,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빠르고 강하게 트럼펫을 연주했다. 아트 파머도 다른 비밥 연주자들처럼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데이비스, 팻츠 나바로의 영향을 받으며 입문했지만, 프레디 웹스터(Freddie Webster)를 듣고 그의 음악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트 파머는 “그의 사운드를 정말 좋아했다. 당시 내 나이 또래의 대부분 연주자들이 속주에 치중했는데, 나는 소리에 치중하기로 결심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Art Farmer Live in ‘64’에서 기타리스트 짐 홀(Jim Hall)과 함께 플루겔혼으로 연주한 ‘Petite Belle’

그에게 60년대는 힘든 시기였다. 1시간 늦게 태어난 쌍둥이 동생 애디슨 파머(Addison Farmer)가 침대에서 자다가 34세의 이른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똑같이 생긴 두 쌍둥이는 젊은 시절 냉동창고에서 같이 일하며 재즈 스타의 꿈을 키웠지만, 더블 베이스를 연주한 동생은 형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동생이 꿈에 나타난다고 토로하며 그에 대한 진한 연민을 토로한 바 있다. 두 번의 결혼은 성공적이지 않아 일찍 갈라섰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미국 사회의 인종편견을 몹시 견디기 힘들어하였다. 당시 유럽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일자리를 찾고 오스트리아 여성과 결혼하여 호수 곁에 집을 짓고 살면서 비로소 마음의 안식을 찾게 된다.

뉴욕 파이브 스폿 클럽에서의 배우 페이 에머슨과 쌍둥이 파머 형제
플루겔혼으로 연주한 앨범 <Something to Live for>(1988)의 동명 타이틀곡

오스트리아 집의 지하실에 방음시설을 갖춘 연습실을 마련한 그는 마음껏 악기 소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루 4~5시간 집에 틀어박혀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더욱 부드럽고 깊은 소리를 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플루겔혼을 불기 시작했다. 트럼펫과 플루겔혼을 비교 연구하던 차에 두 악기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악기 플럼펫(Flumpet)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그의 <Silk Road>(1996)는 플럼펫 연주로 전곡 녹음된 첫 앨범이다. 생활의 안정을 찾은 20여 년 동안에도 미국과 유럽을 바삐 오가며 스튜디오 녹음과 공연을 거르지 않았다.

트럼펫과 플루겔혼의 하이브리드 악기, 플럼펫
로이 하그로브의 트럼펫과 아트 파머의 플럼펫 소리를 비교할 수 있는 협연

그는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후에도 미국과 유럽을 바삐 오가며 녹음과 공연 활동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내성적이고 은둔형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는데, 그의 음악은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있다. 재즈 평론가 레오나드 페더(Leonard Feather)는 그의 음악을 “부드럽고 편안하고 온화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에게 가정을 가져다준 세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뉴욕 맨해튼에도 집을 하나 마련하여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바쁜 연주 일정을 소화하며 1999년 미국의 가장 영예로운 재즈 타이틀인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재즈마스터’ 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나, 그로부터 수개월 후 심장마비로 71세를 일기로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