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Kim chi)’는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RuPaul’s Drag Race, 이하 드래그 레이스)> 시즌8 출연자다. 김치의 어머니가 한국 출신으로, 김치도 한국에서 학창 시절 일부를 보냈다. 자신의 드래그 네임은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다. <드래그 레이스> 인기에 힘입은 내한 공연도 성공적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www.kimchithedragqueen.com/


드래그(Drag)는 자신의 성과 다른 성의 복장이나 행동을 하는 문화, 행위 혹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영미권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복장을 하고 대중 앞에서 연극이나 오페라 등의 공연을 하는 배우들을 뜻했고, 현대에 드래그는 특히 성 소수자 문화에서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사회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과장되게 비틀어 차용하는 사람이나 행동을 뜻하는 말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가령, 드래그 퀸(Drag Queen)은 여성성의 옷을 입은 남성을, 드래그 킹(Drag King)은 그 반대의 의미를 뜻한다. 포 퀸(Faux Queen), 포 킹(Faux King)은 말 그대로 가짜 (드래그)퀸과 킹이라는 뜻으로, 다시 여성이 드래그 퀸을, 남성이 드래그 킹을 차용하는 경우이다.

제프리 슈월츠(Jefferey Schwarz)의 다큐멘터리 <I Am Divine>(2013) 트레일러. 컬트 영화감독 존 워터스(John Waters)의 영화에 출연하여 강력한 아이콘으로 떠올라 논란의 중심으로 살았던 드래그 퀸 ‘디바인(Divine)’의 생애를 그린 영화다

드래그 문화는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들이 패러디하는 것이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인 성별이라는 사회적 규범인 만큼, 미디어에 비치는 극도로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인 모습의 배우나 가수 등이 곧잘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드래그가 패러디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패러디에는 원본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진정한’ 성 정체성은 원본 없는 허구적인 개념이며 오로지 사회적으로 규정되거나 모방하여 왔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드래그가 더 이상 패러디가 아니며, 오히려 성 정체성을 구성하는 모순들을 폭로하는 전복적 행위라고 파악한다. 그러고 보면 드래그 퀸이라고 해서 반드시 특정한 가수나 배우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드래그 퀸은 사회 속에서 ‘여성’이라고 부르는 문화의 조각들을 단순히 가져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자기 생각과 느낌을 드래그에 반영한다. 따라서 모든 드래그는 당연히 일률적인 모습이 아니며, 거기에는 자신이 살아온 문화, 사회적 환경, 자신의 의식이 담겨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드래그의 독창적인 아름다움과 개성 등은 여타 예술 장르나 시각문화에도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

오스트리아 출신 드래그 퀸 콘치타 부어스트(Conchita Wurst)의 <Heroes> 뮤직비디오. 201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자로, 게이이자 드래그 아이콘으로서 성 소수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스타다. 매력적인 수염으로 유명함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래그는 재미있는 정체성의 놀이이기도 하다. 변신이나 변장은 언제나 사람들을 매혹한다. 종종 드래그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며 즐긴다. 드래그 쇼 자체가 공연예술의 장르로 받아들여지면서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쇼가 주는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또 과거처럼 성 소수자와 자유로운 성적 표현을 무조건 배척하는 억압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면서, 규범의 한계를 넘어서는 성적 표현을 더 이상 터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도 일부 생겨났다. 앞서 말한 미국 TV쇼 <드래그 레이스>는 전설적인 드래그 퀸 ‘루폴’을 간판으로 내세운 서바이벌 쇼로, 한국에서도 조용히 인기를 끌고 있다. <드래그 레이스>에 등장했던 드래그 퀸 ‘김치(Kim chi)’는 쇼의 인기에 힘입어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 공연 무대와 퍼레이드 카 위에서 공연하는 드래그들에게는 물론 열광적인 환호가 쏟아지는데, 드래그 퀸 쇼로 유명한 이태원  ‘트랜스(Trance)’나 ‘르 퀸(Le Queen)’의 새벽 쇼 타임에는 헤테로 커플이나 모임도 드물지 않다. 이태원 ‘트랜스’의 간판 드래그 퀸인 ‘유자’와 ‘니나노’는 2013년 이효리의 ‘미스 코리아’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이효리 ‘미스코리아’ MV

아직은 보수적인 분위기 탓에, 한국에서 압도적인 드래그 슈퍼스타가 나오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수많은 드래그 퀸과 킹들이 꾸준히 크고 작은 무대에 서며, 여러 장르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중 2017년 상반기에 공개된 두 편의 뮤직비디오에 한국의 드래그 퀸들이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모어(More)’, ‘쿠시아 디아멍(Kuciia Diamant)’, ‘믹주(Mikju)’는 지금 주목받는 젊은 드래그 퀸들이다. 특히 모어는 두 편에 모두 출연해 특유의 우아함을 뽐낸다. 수많은 드래그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과시할 어느 때를 기다려보자.

신세하 ‘Tell Her’ MV

몽환적이고 복고적인 사운드로 주목받는 젊은 뮤지션 신세하는 음악에 맞춰 빈티지한 분위기의 뮤직비디오를 선보여왔다. ‘Tell Her’를 위한 영상은 사진가 뇌(N’ouir)가 연출을 맡았다. 서울과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잘 담아낸 사진작업을 선보여온 뇌는 전작인 김사월X김해원의 ‘Honey Baby’ 뮤직비디오에서도 보여줬던 것처럼,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흐릿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Honey Baby’가 복고적인 무드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보다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인 흐름을 담아냈다면, ‘Tell Her’에서는 그보다 더 분위기 자체를 구현하는 데에 중점을 둔 듯 보인다.

비트가 강조된 신세하의 곡에 맞춰 도심의 폐허 같은 뒷골목과 상가, 텅 빈 공연장, 옥상 등의 공간, 바랜 듯한 색감과 거친 질감의 아날로그적인 화면, 번쩍이는 간판불이나 조명과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와 희미한 초점의 인물이 리드미컬하게 어우러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드래그 퀸 모어, 쿠시아 디아멍, 믹주는 드래그 쇼에서처럼 립싱크와 안무를 선보이고, 신세하 역시 드럼과 베이스, 키보드의 셋으로 공연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래된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영상에는 네 사람의 과장된 몸짓과 1980년대 사진 속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차림새도 눈에 띄지만, 세 드래그 퀸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키치적인 정서가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이다. 일상이 전개되는 도시의 틈새에서 연극적인 차림과 몸짓의 드래그 퀸들은 생경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덕분에 2017년 한국의 어딘가라기보다 1980년대 즈음의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 비디오로 담은 듯한 영상이 완성되었다. 세 퀸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햇살 아래 담은 장면은 꿈꾸는 듯 모호하고 나른하다.

이랑 ‘나는 왜 알아요 / 웃어, 유머에’ MV

여섯 명의 친구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분주하게 화장을 시작한다. 드래그 퀸 모어와 가수 이랑의 친구들이다. 입술을 그리는 데에 서툰 사람도 있고 능숙하게 눈썹을 칠하는 사람도 있다. 소박하고 볕이 잘 드는 집은 주인이 좋아하는 것들로 꾸며졌다.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은 수다를 떨고 의논을 해가며 서로를 도와 치장을 한다. 다 꾸민 뒤 이들이 향한 곳은 서울의 어느 골목길 담벼락 아래다. 대낮에 화려하게 치장한 여섯 사람이 카메라를 향해 모델처럼 포즈를 취한다. 영상을 보며 ‘나는 왜 알아요’의 가사를 따라가면 이들이 노래처럼 고단하고 알 수 없는 삶에 참전하기 위해 갑옷을 입는 듯한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웃어, 유머에’의 하하, 헤헤, 히히의 의성어가 감싸는 후반부는 잘 차려입은 친구들이 서로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나눠 먹는 장면이다. 극도로 화려한 치장에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노래가 전달하는 서글픔의 정조가 만든 긴장은, 놀림인 듯 자조적인 듯한 웃음 속의 식사 장면에서 서로를 향한 따뜻한 우정과 용기의 에피파니로 전환된다.

위는 이랑의 ‘나는 왜 알아요 / 웃어, 유머에’ 한 장면. 아래는 낸 골딘의 사진 작품 <Picnic on the Esplanade>(1973)

소수자 커뮤니티가 갖는 특유의 유머와 이해, 친밀함 등의 분위기는 사진가 낸 골딘(Nan Goldin)의 1973년 사진 <Picnic on the Esplanade>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사진이 1970년대의 시대적 맥락 때문에 얻게 된 애상적 정서와 달리 훨씬 건강하고 씩씩하다. 한껏 꾸민 이들은 드래그 퀸, 포 퀸(Faux Queen)이 되었다. 어쨌든 여섯 명의 여왕이다. 누군가 유튜브 영상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진짜 다들 신 같아요.” 영상의 기획과 연출에 다재다능한 이랑이 직접 참여하였고, 더 도슨트(The Docent)가 촬영과 편집까지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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