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터 영은 스물넷의 젊은 나이였던 1933년 재즈와 블루스의 도시 캔자스시티(Kansas City)에 정착하여,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인기 재즈 뮤지션으로 부상했다. 다른 뮤지션들과는 달리, 그는 납작한 포크 파이 모자(Pork Pie Hat)와 모카신(Moccasins) 가죽구두와 같은 튀는 패션을 즐겼고 스스로 만든 힙스터 은어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헵캐트’(Hepcat, 한량)나 ‘힙스터’(Hipster)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연주 스타일 역시 남들과는 달리, 가늘고 느리며 물 흐르듯 연주했으며 비브라토(바이브레이션)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당시 딕시랜드 재즈와 스윙 음악을 주력으로 했던 신생 음반사 ‘코모도 레코드’(Commodore Records)가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멤버들을 ‘캔자스시티 식스’(Kansas City Six)라는 이름의 소그룹으로 편성하여 4회에 걸쳐 녹음했는데, 이 중 1938년과 1944년 두 번의 세션에서 레스터 영의 전성기 연주를 들을 수 있다.

Kansas City Six ‘Way Down Yonder in New Orleans’(1938)

레스터 영의 음악 활동은 그가 50세로 사망한 1959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그가 1944년 9월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10여 년의 짧은 기간이 진정한 전성기로 평가된다. 입대 후 다른 뮤지션과는 달리 군악단에 소속되지 못하고 일반 사병으로 배치되었던 그는, 머리 깎기를 싫어했고 총 쏘기를 거부하는 등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마리화나 소지죄로 체포되어 400일 동안 영창에 구금되었다. 그 동안 인종 차별적인 가혹한 대우를 받으면서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게 되었고, 결국 군 생활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여린 성격에 정신적 상처를 안게 된 그는 음주와 마약에 깊게 빠졌고, 결국 카운트 베이시 악단 시절의 명연주는 다시는 재현되지 않았다. 제대 후에는 이전보다 자주 공연하고 더 많은 음반을 냈지만, 그의 연주는 상투적인 클리셰를 반복하여 창의성이 빛을 잃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캔자스시티 식스’ 시절의 레코딩 가치는 더욱 부각되고 빛을 발했다.

캔자스시티 식스의 주력 멤버 레스터 영, 벅 클레이턴(트럼펫), 에디 더럼(기타)이 트리오로 연주한 ‘Countless Blues’(1938)

‘캔자스시티 세션’의 역사는 뉴욕의 저명한 재즈 프로듀서 존 하몬드(John Hammond)가 소문을 듣고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연주를 직접 듣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악단에 소속된 뮤지션들을 수시로 차출하여 소규모 밴드 편성의 스튜디오 녹음을 가졌다. 처음에는 기타리스트 에디 더럼(Eddie Durham)을 중심으로, 벅 클레이턴(트럼펫), 조 존스(드럼), 월터 페이지(베이스) 등을 모아 캔자스시티 파이브(Kansas City Five)라 부른 세션을 가졌다. 여기에 레스터 영이 가담하면서 ‘캔자스시티 식스’가 되었으며, 벅 클레이턴과 레스터 영의 트럼펫, 색소폰 더블 솔로 연주를 전면에 내세우며 인기를 얻었다. 악단의 ‘디바’였으며 레스터 영과 친밀했던 빌리 홀리데이가 레코딩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은 청중들의 요구나 간섭, 댄스 반주에서 오는 스트레스 없이 자유롭고 즐거운 연주를 남겼다. 레스터 영은 1938년 캔자스시티에서, 그리고 1944년 입대 직전에는 뉴욕에서 두 차례 세션에 참여하여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레스터 영의 클라리넷 솔로를 들을 수 있는 ‘I Want a Little Girl’

날이 갈수록 레스터 영의 인기가 상승하자, 레스터 영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캔자스시티 식스 1938~1944’로 표기된 다양한 컴필레이션 음반이 발매되었다. 당시 녹음되었던 레퍼토리 중 ‘Way Down Yonder in New Orleans’(1938)가 레스터 영의 클라리넷 솔로와 테너 색소폰 연주를 모두 들을 수 있는 대표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뉴욕 진출 후 악기를 잃어버리자 더 이상 클라리넷을 연주하지 않았는데, ‘Countless Blues’와 ‘I Want a Little Girl’에서 그의 클라리넷 솔로를 들을 수 있다. 빌리 홀리데이가 함께 녹음한 곡 중에는 ‘Without Your Love’가 많이 알려졌다. 1944년 뉴욕 세션은 1938년 캔자스시티 세션과는 완전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캔자스시티 식스’라는 이름의 세션으로 발매되었는데, 트럼페터 빌 콜먼(Bill Coleman)와 트롬보니스트 딕키 웰스(Dickie Wells)가 솔로이스트로 함께 했다.

Kansas City Six ‘Without Your Love’ (feat Billie Holiday)

레스터 영은 비극적인 군대 생활을 끝내지 못하고 퇴출된 후에는 버브(Verve)의 대표 프로듀서 노먼 그랜츠(Norman Granz)와 함께 하면서 입대 전보다 양적으로 방대한 레코딩을 남겼으나 세간의 평가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는 지나친 음주와 방탕한 생활로 인해 날이 갈수록 음악성과 건강은 악화되었고, 1959년 유럽 순회공연을 하면서 지나친 음주로 인해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 날 호텔에서 내출혈로 인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그가 사망하기 불과 두 달 전 유럽 현지에서 그를 인터뷰한 프랑스 기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 “나는 트럼펫, 트롬본 같은 소리는 잡음 같아 좋아하지 않았지. 나는 뭔가 부드러운 것을 추구했고, 그것은 달콤한 것(sweetness)이어야만 했어.”

캔자스시티 식스의 뉴욕 세션 중 ‘I Got Rhythm’(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