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지’(Grunge)는 ‘넝마’ ‘지저분한 것’ ‘더럽고 불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애틀의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을 공동설립한 브루스 파비트(Bruce Pavitt)는 시끄럽고 세련되지 않은 인디 록 밴드의 음악을 ‘그런지’ 밴드라고 부르면서 상업적인 유행을 주도했다. 1990년대 초반에 나타난 그런지 밴드들은 금방 시애틀의 언더그라운드 신을 점령하였고, 인근에 있는 캘리포니아로, 그리고 미국 전역과 해외로 퍼져 나가면서 하나의 문화 신드롬을 형성하였다. 음악적으로는 펑크와 헤비메탈을 흡수하였고, 소외와 배반, 마약 중독, 심리적 트라우마 등 X세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사에 담았다. 1990년 초반에 시작되어 중반에 이미 최고조를 이루었던 ‘그런지 운동’(Grunge Movement)은 메인스트림 문화로 흡수되며 1990년대 후반이 되자 퇴조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패션이나 그래픽 디자인, 문학 등에 그런지의 영향이 남아있다. 당시 그런지 열풍을 주도했던 다섯 밴드의 다섯 앨범, 그리고 대표곡에 대해 알아보았다.

 

Nirvana <Nevermind>(1991)

시애틀 근교의 애버딘(Averdeen)에서 1987년에 결성된 3인조 얼터너티브 밴드로, 두 번째 앨범 <Nervermind>이 돌풍을 일으키며 그런지 운동의 핵으로 떠올랐다. 짧은 기간에 단 네 장의 음반으로 약 7,5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하였으며, 그래미 어워드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수상하며 저물어가는 록의 부흥을 주도하였다. 이 앨범에 수록된 ‘Smell Like Teen Spirit’은 독특한 기타 리프로 점점 입소문을 타며, 빌보드 핫100에서 6위에 올라 앨범 부문 톱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밴드의 리더이자 ‘X세대의 전도사’라 불리며 돌풍의 중심에 섰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마약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27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남은 멤버는 창단 7년 만에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전설로 남았다.

앨범 <Nevermind>에 수록한 ‘Smells Like Teen Spirit’

 

Pearl Jam <Ten>(1991)

1990년 시애틀에서 결성된 5인조 밴드로, 정통 하드 록을 추구하다가 그런지 열풍을 타고 Nirvana와 쌍벽을 이루는 그런지 밴드로 우뚝 섰다. 보컬을 맡은 에디 베더(Eddie Vedder)을 중심으로 안정된 팀웍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11장의 앨범으로 약 8,5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하며 그런지 밴드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하였다. 데뷔 앨범 <Ten>은 부진하게 출발했으나 점점 인기를 얻으며 빌보드 앨범 차트에 5년 동안 머물면서 13X 플래티넘을 기록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왜곡하고 선입견을 준다며 뮤직비디오 제작을 거부하거나, 공연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며 공연예매 대행사인 티켓마스터(Ticketmaster)를 고소하는 등 기존 음악산업의 행태를 비판적인 시각을 공공연히 표출했다. 이들의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몸을 부딪혀가며 맹렬하게 춤을 추는 열혈 록팬 ‘모셔’(Mosher)들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알려졌다.

앨범 <Ten>의 대표곡 ‘Alive’

 

Soundgarden <Superunknown>(1994)

1984년에 시애틀에서 결성한 4인조 밴드로, 그런지의 토양을 만든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정작 1989년에 메이저 레이블 A&M로 이적하면서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 이적 후 낸 네 번째 앨범 <Superunknown>이 빌보드 앨범 차트 톱에 올랐고, 싱글 ‘Spoonman’과 ‘Black Hole Sun’은 그래미상을 받았다. 다음 앨범 <Down on the Upside>(1996) 역시 앨범차트 2위에 오르면서 짧은 전성기를 누렸다. 성공 후 계속되는 공연에 지친 멤버들 간 불화로 1997년 하와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밴드는 해체되었다. 2010년에 다시 모여 한 장의 음반을 더 냈으나 2017년에 밴드 리더 크리스 코넬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2019년까지 판매한 음반은 약 3,000만 장에 이른다.

앨범 <Superunknown>의 대표곡 ‘Black Hole Sun’

 

Alice in Chain <Dirt>(1992)

시애틀 출신의 4인조 정통 헤비메탈 밴드로 그런지 열풍을 타고 순식간에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두 번째 앨범 <Dirt>가 빌보드 앨범 순위 6위에 올랐고, 싱글 ‘Would?’가 시애틀을 배경으로 X세대의 사랑을 대변한 로맨스 영화 <Singles>(1992)에 수록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다음 앨범 <Alice in Chain>(1996) 역시 빌보드 앨범 차트 톱에 올랐으나, 밴드의 핵심 멤버들이 술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면서 활동은 갈수록 뜸해졌다. 결국 밴드의 핵심이었던 레인 스테일리(Layne Staley)가 결국 마약 과용으로 34세의 나이에 사망하였고, 한동안 밴드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연주 실력 면에서 그런지 밴드 중 최고로 인정받았으며, 음울한 멜로디와 어두운 가사 내용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정규 앨범 6장과 실황 앨범 3장을 발표하여, 약 3,0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하였다.

앨범 <Dirt>의 ‘Would?’

 

Stone Temple Pilot <Core>(1992)

캘리포니아 남쪽 샌디에이고의 클럽에서 ‘마이티 조 영’(Mighty Joe Young)라는 밴드 이름으로 기반을 쌓았다. 메이저 레이블 애틀랜틱(Atlantic)과 계약 후 데뷔 앨범 <Core>가 빌보드 앨범 차트 3위에 올라 그런지 열풍에 올라탔으며, 이 앨범에 수록한 ‘Plush’가 MTV 뮤직비디오 부문, 빌보드와 그래미를 차례로 수상하였다. 밴드의 주축인 딜레오(DeLeo) 형제와 보컬리스트 스콧 와일랜드(Scott Wayland) 간에 불화를 생겨 2003년에 해산했다가 5년 만에 재결성하였고, 2013년에 완전히 결별하였다. 딜레오 형제와 소송을 벌이던 스콧 와일랜드는 얼마 있다가 마약 과용으로 2015년에 사망하였다. 2017년에는 그의 후임이었던 보컬리스트 체스터 베닝턴이 우울증과 마약 중독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여 비극은 계속되었다. 이제까지 4,0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하였으나, ‘그런지 모방자’ 또는 ‘듣기 좋은 얼터너티브’라는 비판이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앨범 <Core>에 수록한 ‘Plu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