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독특하고 실험적인 밴드.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실리카겔도 어느덧 햇수로 8년 차 밴드다. 긴 시간을 함께한 공동체로부터는 단단한 질서나 규율과 같은 구조가 잘 갖춰진 세계가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실리카겔은 조금 다르다. 혼돈을 유연하게 즐기며 가지고 놀 줄 아는 사람들이다. 본인들의 음악에도 그리고 밴드라는 공동체에도 이런 혼란함을 반긴다. 가사엔 같은 문장에서 보지 못할 법한 단어의 조합이 당당하게 등장하고, 의외의 여러 브랜드들과 협업하기도 한다. 대중적인 시도를 한 ‘NO PAIN’을 통해 뜨겁게 사랑받는 이들을 보면서, 실리카겔의 다음이 궁금해졌다. 이들은 어떤 밴드가 되려는 걸까? 독립 서점에서 실리카겔을 만나 ‘NO PAIN’ 작업 이야기와 협업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음악과 소리를 대하는 진중한 태도, 그리고 어떤 존재와 섞일 수 있을 것 같은 실력까지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한주, 최웅희, 김건재, 김춘추

 

Q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라고 ‘NO PAIN’은 시작돼요. 마치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 같아요. 이전 곡들과 다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상이 ‘너'에서 ‘우리'로 확장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우리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된 배경이 있을까요?

한주 ‘NO PAIN’ 이전의 곡들에선 사실 의미적인 접근 자체가 많지 않았어요. 음악을 기술이나 음악 자체로만 해석을 해왔던 것 같아요. ‘NO PAIN’이 저희 음악 중에 처음으로 의미가 있는 듯한 노랫말이 나온 곡이어서 그런 메시지가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전엔 의미적인 접근을 떠나서 정말 만들고 싶은 노랫말을 만들고 어쩌면 이기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들을 풀어냈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초청한다는 개념은 아예 배제했었죠. 그렇다고 ‘너', ‘나'와 같은 단일 대상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아예 대상조차 없었어요. 노래는 노래일 뿐이고 저희는 말을 만든다기보다는 소리를 만든다는 개념으로 접근을 해왔죠. 그런데 'NO PAIN'을 작업하면서는 마음의 힘을 돋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가사를 쓰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NO PAIN’은 발매 이후에 듣는 분들에 의해서 의미가 더 쌓여가고 있는 것 같아요. 공연장의 청중들, 동료 또는 팬분들같이 초청된 사람들이 ‘NO PAIN’을 새롭게 만들어주고 계시고, 저희로서는 이런 모습이 굉장히 사랑스럽고 뭔가 아름답게 느껴져요. 내가 만든 집으로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정말 다행히도 집에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연대도 하는 모습이죠. 예상치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함께 더불어 있는 모습은 저희가 조성했다기보단 조성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춘추 'NO PAIN'이라는 곡은 엄밀히 말해 실리카겔이 다 같이 쓴 곡은 아니에요. 한주가 써놓은 가사와 어떤 음악의 형태를 디자인해둔 게 있었어요. 거기에 멤버들이 해석하는 과정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NO PAIN'이라는 음악이 나온 거라서 이야기가 우리로 확장된 배경이 딱히 누군가에게 있진 않아요. 한주 얘기처럼 그동안 소리로서 접근하는 작업 방식이 저희에게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거예요. ‘NO PAIN’처럼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곡이 또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의 노래가 있으니까요.
확실히 'NO PAIN'이 가진 차별성은 ‘전달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라는 점인 것 같아요. 그게 듣는 사람들한테 어떠한 형태로든 전달되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곱씹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걸 배운 것 같아요. ‘이런 스타일로 음악을 만들었을 때 소비는 이렇게 이뤄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재밌었어요. 이런 식으로 곡 작업하는 것에 앞으로 또 한 번 도전해봐도 좋겠다는 정도로 생각해요.

 

‘NO PAIN’ 뮤직비디오

 

Q 곡을 작업할 때, 마음의 힘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힘을 주고 싶은 대상이 있었던 건가요?

한주 곡을 쓸 때까지만 해도 의도적으로 마음의 힘을 돋우기 위해서 이런 말을 쓰자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멤버들도 심리 상태가 오르락내리락할 때가 있잖아요. 저는 내리락일 때가 더 많은 편인데, 사실 이전에 음악을 할 때는 정서적인 거에 의존해서 곡을 쓰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NO PAIN' 작업할 땐 제 정서가 반영됐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원했던 것 같아요. 그런 힘을 받고 싶었던 거 같아요. 다른 사람한테 힘을 빌리기도 하고 나눠줄 힘이 있다면 저도 나눠주고.

 

Q 그게 음악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NO PAIN’을 듣고 위로받고 힘을 얻은 분들이 많으니까요.

한주 'NO PAIN' 작업이 한창일 때 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발매쯤엔 저희 팀이 해체하게 됐고요. 그런 일련의 과정들도 작업에 꽤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그래서 ‘회사 생활에서 팀원들뿐만 아니라 뭔가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졸업시킬 수 있는 노래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작업 기간에 좀 많이 했습니다.

 

김한주

 

Q 가사에 다수를 지칭하는 단어들이 종종 등장해요. 그리고 결사체를 의미하는 ‘자경단'이 나오죠. 단어의 의미 덕분인지 노래를 듣다 보면 소속감 같은 게 느껴져요. 작사할 때 ‘자경단'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 배경이 있다면요?

건재 자경단이라는 단어 자체가 많이 통용되진 않아요. 게임이나 만화 같은 데서 나오는 단어이고 그래서 한주의 취향이 들어간 것 같아요.

한주 기억이 안나요(웃음). 1절이 굉장히 밝은 톤으로 달리다가 ‘자경단'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간에서는 상대적으로 사운드가 조용해져요. 그게 밤이 찾아온듯한 이미지처럼 느껴졌고, 잠행해서 뭔가를 훔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긴 했어요. 그런데 사실 처음 작사할 때는 일단 허밍을 해요. 이미지와 허밍에서 자연스럽게 입에 붙는 모음을 결합했을 때 가장 적절한 단어가 무엇일지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아요.

웅희 랜덤한 단어들이 모여서 말하려던 게 한 번씩 튀는 느낌이 들면 해석도 다채로워지는 것 같달까요. 이상한 해석이 나오기도 하고 ‘저건 아니다’ 아니면 ‘그럴 수 있겠다'라는 여러 해석이 나오면서 그것들이 뒤죽박죽되는 게 포인트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허밍에서 나온 헛소리가 그래서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Q 요즘 ‘자경단'은 실리카겔을 지키겠다는 팬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요. 팬들이 특정 가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가요?

춘추 재밌어요. 매우 재밌고. 예전에 다른 인터뷰에서 ‘NO PAIN’에서 가장 인상적인 가사나 단어가 있느냐는 질문에 자경단이라고 대답했거든요. 다른 이유는 없고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되게 재밌어서였어요. 파워레인저 같은 느낌도 있고. 그런데 다들 비슷했나 봐요. 자경단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묘한 팀 같은 느낌을 좋아해서인지 팬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쓰자고 한 적은 없지만요.
의도적으로 만든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단어로 뭔가를 만들고 놀고 하는 게 아주 재밌는 것 같아요. 갖고 노는 느낌인 거죠.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전달하는 것보다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의도한 것과 비슷하게 전달이 되거나 의도한 바를 사람들이 추측하는 과정 자체가 재밌어요. 음악이든 그림이든 무언가를 만들어서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재밌는 요소 같아서 즐거워요.

건재 저희 가사가 솔직히 어려워요. 어떤 기호 같은 느낌이 키 요소가 돼서 관객분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실 때 어떤 핵심적인 몇 가지 단어에서만 또렷하게 따라부르세요. 자경단만 아주 또렷하게 외치시는 거죠. 다른 구간은 얼버무리다가요. ‘Desert Eagle’에서도 ‘We love for the end and desert’보다 ‘섬광'을 더 좋아하세요. 가사에 힘을 집중시킬 수 있으면서도 모두가 붙을 수 있는 상징 같은 게 생기는 것 같아서 재밌습니다.

 

Q 올해 정말 여러 페스티벌과 공연 무대에 올랐잖아요. ‘NO PAIN’은 음원 발매 전부터 공연에서 연주해왔던 곡이에요. 무대에 설수록 곡을 향한 관객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걸 경험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한주 일단 ‘NO PAIN’ 데모를 동료들끼리 공유하고 그 후 발매까지의 과정에서 반응들이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좀 재밌었어요. 처음에 데모를 들려주고 ‘좋다! 내자!’ 이런 반응이 왔을 때만 해도 ‘내가 만든 건데 당연히 좋아야지’ 이런 느낌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리고서 연초에 했던 노들섬 단독 공연에서 동료들이 아닌 관객에게 처음 공개를 했을 때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반응이 좋은 것 같고 사람들이 곡을 기다리기 시작한 것 같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 뒤로 공연할 때 앵콜 곡을 따로 준비해둔 게 있는데도 관객들이 “‘NO PAIN’해주세요"라고 외치고요. 음원 발매가 안 된 상황에서 기대감이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감사하고 그랬었죠.
펜타포트 페스티벌 때는 발매 직전이었던 시기잖아요. 근데도 사람들이 곡이 어디서 터지는지를 알고 슬램존을 형성해서 놀길래 신기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발매하고 나니까 ‘우리 원래 다 알고 있던 곡이야.’ 이미 이런 상황이어서 편하게 저희랑 같이 노래하고 그렇게 됐어요. 기대감이 올라오다가 빵 터지는 과정 자체를 느끼는 게 즐거워요. ‘NO PAIN’은 지금도 스토리가 쌓여가고 있는 곡이라서 한순간을 꼽는 건 아까울 것 같아요.

 

‘NO PAIN’ 노들 라이브 하우스 라이브 영상

 

Q 무대에 서면서 얻은 힘이나 영감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아요. 다음 작업에 이런 건 반영해보고 싶다 하는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나요.

한주 저희 팀은 코로나 시기에도 공연을 많이 한 편이긴 해요. 그땐 객석에 관객분들이 앉아 계시고 박수 외에는 아무 리액션을 할 수가 없었죠. 저희도 그런 상황에 맞춰서 공연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셋리스트를 짜다 보니까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어요. 객석 규율이 좀 완화된 뒤로 처음 선 페스티벌이 피크페스티벌이라는 데였어요. 무대에 딱 등장하는 시점부터 관객분들이 소리를 지르는데 ‘원래 이런 거였었나’ 싶더라고요. 그때를 시작으로 이런 저런 공연들을 하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저희를 젖게 만들고 ‘NO PAIN’을 내고서는 객석의 분위기가 2배 3배 이상으로 뜨거워지고 하면서 ‘다음에 이런 곡을 또 써야겠다.', ‘이렇게 호응하기 좋은 곡을 써야겠다’라는 영향을 확실히 주는 것 같기는 해요. 사람들을 뛸 수 있게 하는 곡이라거나 따라부르기 좋은 곡을 써야겠다는 의식이 들긴 합니다.
중요한 건, 이런 영향을 긍정적으로만 소화하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좋은 곡을 쓰는 데 있어서 이런 의식을 하는 게 어떤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근본적으로 진짜 훌륭한 곡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우선이 되어야 하니까요. 객석과 호응하는 부분에서 발생한 니즈에 맞춰 곡을 쓰다 보면 개성을 잃어버릴 수 있고요. 실제로 집에서 곡을 쓰는데 ‘공연 때 이런 분위기라서 좋았지’라고 생각하며 써봤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들어보니까 너무 별로인 거예요.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성장할 수 있는 어떤 숙제가 떨어진 것 같아요. 기준이 생겼을 때 기준을 따르는 게 아니라 기준을 갖고 놀 줄 알아야 하는 건데. 새 앨범 작업하면서 여기에 대한 훈련을 멤버들이랑 같이 해야 할 것 같아요.

 

김춘추

 

Q 얼마 전에 <NO PAIN: The World Without Music>이라는 다큐멘터리 영상과 노션 페이지를 공개했어요.

춘추 음반이 세상에 나오면 앨범 커버와 제목으로 공개돼요. 하지만 음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작 과정이 되게 소중하잖아요. 그래서 ‘NO PAIN’을 음반으로 내자라고 결정을 한 뒤로 ‘녹음 계획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과정을 남겨놔야겠다’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녹음하는 과정도 영상으로 몇 개 찍어놓고 그랬어요. 최종적으로 발매를 기다리는 시점이 되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곡을 만들기 위해 걸어온 과정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완전하고 급급하게 준비된 게 아니라 잘 계획된 방식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이 잘 배합되어 나온 좋은 음반이었어요. 그래서 이거를 꼭 남겨야겠다. 우리가 이걸 만들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꼭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음악 없는 세상’이라는 가사 속 구절을 사용한 데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춘추 주요한 가치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상황에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해야 한다고 믿는 것들을 놓지 않으려고 되게 많이 노력해요. 증발되어 버리는 것들을 굳이 굳이 잡고 있어요. 이런 가치가 계속 남아서 통용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음악은 시각적으로 볼 수는 없잖아요. 많은 사람이 음악이라는 매체를 중요하게 생각은 하지만, 실질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나 생각은 자주 다뤄지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결과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동료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였던 것 같기도 해요. 음악을 열심히 만든 본인이 그 부분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가치가 사라지는 상황, 음악 없는 세상을 어쩌면 뮤지션이 만들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김건재

 

Q 왜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 관해서는 얘기를 점점 하지 않게 되는 걸까요?

춘추 그냥 그렇잖아요. 음악이 형태가 없는 분야이기도 하니까 엄청 간접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사회적으로 음악에 두는 가치가 생각보다는 조금 가볍다는 느낌이 기도 해요.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 음악 정말 열심히 한다고요’ 이런 식으로 하기도 웃기잖아요. ‘세상에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 이런 느낌도 들고. 어떻게 보면 1차원적인 방식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어필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거예요.

건재 비슷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얼마 전에 달걀말이 프라이팬을 샀어요. 사러 가니까 엄청나게 많은 달걀 요리용 프라이팬이 있더라고요. 게다가 그것 하나로도 오믈렛, 스크램블, 반숙란, 머랭 등등 여러 요리로 손 쉽게 변환할 수도 있고, 또 그에 수반하여 다양한 도구들 또한 많이 연구돼고 제작되는 시대인 것 같아요. 근데 그러다보니 정작 ‘생산된 달걀’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중요했던 것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 했던 것 들이 서로 가치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서, 20년 후에는 닭이랑 달걀이랑 어떤 관계인지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요즘 음악에도 이런 재밌는 상황이 많이 있어요. 808이라고 하면 저희는 그게 어떤 장비인지 소리의 특징이 뭔지 알지만, 요즘은 808이 어떤 기호처럼 인식되는 것처럼요. 저희는 중간에 낀 세대로서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최웅희

 

Q 실리카겔은 여러 협업도 많이 해오고 있어요. 협업하는 대상에 경계가 없어 보여서 그런 작업들이 프로그레시브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요. 의류 제품과 작업한다거나 금융 서비스의 음악을 만들고 OTT서비스랑도 협업을 했어요. 어떤 기준을 가지고 협업을 진행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웅희 피처링 아티스트나 브랜드 협업에 있어서 스타일을 두고 하는 편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우리랑 어울리고 이 사람은 안 어울려’ 이런 식이 아니라 완전히 열어두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지금보다 더 혼란스럽게 협업을 해보자.

건재 고려 인삼도?

웅희 인삼에 실리카겔 노래를 붙인다고 힘이 날진 모르겠지만.. 뭐 그렇습니다.

춘추 밴드나 뮤지션이 협업하는 경우는 원래 많잖아요. 실리카겔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 음악 생태계가 변화하는 와중에 저희는 안 바뀌고 있다 보니 오히려 독특하게 비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밴드도 많이 사라지고 셀프 프로듀싱 아티스트도 많이 없어져 가고 좀 더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끼는 형태의 인디 뮤지션도 등장하면서 생태계가 바뀌고 있잖아요. 전통적인 밴드의 형태로서 활동하는 그룹이 급격히 줄어드는 경향이 있고요. 그래서 유난히 저희가 가는 길이 그래 보인다는 느낌이 있는 거 같은데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개인적으로는 협업할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의 퀄리티로 만들어내려고 하죠. 말씀하신 것처럼 ‘토스랑도 작업했는데 들어보니 음악이 정말 좋네’ 혹은 ‘실리카겔 되게 독특하다’라는 반응이 어쨌든 나오니까 그런 부분이 저희한테는 활동적인 면에서 봤을 때 큰 이득이 돼요. 비즈니스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활동이니까 적극 최대한 활용하고 이용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또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고요.

 

실리카겔이 작업한 토스 브랜드 영상 <새로운 차원을 향한 여정 | THE JOURNEY>

 

Q 이런 다양한 협업이 밴드에게 지속 가능한 무언가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협업하는 데 있어서 원동력은 뭔가요?

춘추 음악 하는 게 도 닦는 건 아니니까 뮤지션으로서 순수하게 음악만 해나간다는 건 어떻게 보면 조금 어리석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현명하게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뮤지션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서 계속 음악을 하면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저희 멤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여러 개인 활동을 하면서도 밴드라는 점을 이용해서 각자의 가치를 계속 올려나가는 방식으로 실리카겔이라는 팀을 현명하게 운영해나가야겠다. 그러려면 좀 더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하는 게 꽤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한주 협업이 수익 모델로 유의미하기에는 좀 어렵죠. 들어오는 작업이 랜덤하니까요. 저희가 예전에는 협업이라는 거에서 살짝 보수적이긴 했어요. 이제는 실리카겔이 음악적으로든 아트적으로든 우리가 새로운 걸 직접 창출한다고 하기보다 다른 존재들과 합성을 해서 그러니까 섞어서 새로운 걸 만드는 걸 저희는 ‘신서사이즈 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게 생존의 중요한 수단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농담 같은 표현이지만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라는 말처럼 ‘오직 협업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는 사회 구성원들이 하나의 완전체로서 그 역할을 하기보다 각각의 모듈들이고 그 모듈들이 모여서 하나의 완전체가 된다. 그 점에서 실리카겔도 사회의 작은 모듈일 뿐이고 다른 역할을 하는 모델과 합체해서 새로운 기능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거죠.

 

여기서부터는 대화 형식으로 인터뷰가 구성됩니다.

 

Q 실리카겔은 개인과 밴드를 오가며 팀플레이를 하는 밴드로 알려졌어요. 앞으로 뮤지션으로서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긴다면 개인 혹은 밴드로서 더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나요?

웅희 개인적으로는 시트콤을 만들고 싶어요. 실리카겔 시트콤. 시트콤인데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어서 하여튼 시트콤처럼 아니면 그냥 에피소드 있는 콩트 같은 거를 만들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시트콤이 정규 앨범처럼. 그러니까 정규 앨범이 이제 새로운 형태로 나올 수 있는 거죠.

춘추 공연하는 걸 생각했어요. 되게 뻔한 거긴 한 데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없고. 저희가 라이브할 때 음원에 있는 여러 가지 소리를 플레이 백으로 틀고 연주를 하거든요. 그래서 제 원대한 꿈은 MR에 있는 소리도 다 연주자가 연주하는 거예요. 풀 연주.

건재 R석 77만원

춘추 그게 너무 당연한 건데 어쩔 수 없이 효율을 위해 그렇게 된 거죠.

한주 형이 대답한 거에서 생각이 든 건데. 예컨대 ‘Kyo181’같은 곡의 경우엔 라이브로 구현 자체가 어려운 소리가 좀 많아요. 신시사이저 소리라거나 제 목소리로 이루어진 화음들이 계속 나오는데, 그걸 다른 목소리 주자들을 불러서 섞으면 느낌이 다르고 그렇다고 제가 분신술을 써서 동시에 여러 목소리를 낼 순 없으니까요. 레코딩 기술이 개발되면 될수록 라이브를 고려하지 않는 새로운 소리들이 생겨나니까 딜레마인 것 같긴 해요. 라이브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너무 많은데. 쳇 베이커 ‘My Funny Valentine’들어보면 목소리가 속삭이듯 작지만 가까이 있어요. 이게 레코딩이라는 개념이 생겨서 성립 가능한 소리지 라이브에서 그렇게 소화하는 것 자체는 엄청 어렵잖아요.

건재 언제 한 번 음반 발매한 순서대로 앨범 전곡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요. 디너쇼 같은 느낌인가요. 앨범 전곡, 기존에 있던 디스코그래피를 다 연주하는 그냥 죽는 날인 거죠. 러닝타임 4시간 이런… 쭉 정리하는 공연을 한번 해보고 싶긴 해요.

웅희 디너쇼였는데 모닝 쇼로 끝나는 그런 거지.

 

실리카겔 ‘Kyo181’ 뮤직비디오

 

Q 실리카겔의 행보를 보면, 평소 멤버들이 보고 듣는 문화적인 것이 궁금해집니다. ‘NO PAIN’으로 실리카겔에 새로 입문한 팬들도 멤버들은 평소에 어떤 걸 하는지 궁금해 할 것 같아요. 책방에서 인터뷰하는 만큼 최근 읽고 있는 책을 얘기해주셔도 좋고, 요즘 재밌게 보고 듣는 것이 있다면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건재 그럼 책을 들고 있는 웅희부터 할까요.

웅희 솔직히 요즘은 책을 많이 읽지를 않고 있어요. 책보다는 영상물에 미쳐있는데. 최근에 영화<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를 보고 여기에 아직 갇혀있어요. 정신이 아직도 거기에 있어요. 정말 강력추천 드리고 재밌습니다.

춘추 저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읽는 거를 좋아해요. 읽는 행위를. 포럼을 엄청나게 많이 보고, 사운드 관련한 분들 거를 많이 봐요. 장비 설명서 같은 거 읽는 걸 좋아해요. 악기가 정말 많아요. 그래서 사용법과 특징을 익히기 위한 매뉴얼을 열심히 읽는 편입니다. 책이라고 하면 추리소설을 되게 좋아해요. 추소. 추소를 되게 좋아해서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한주 제가 장비 사면 저보다 춘추 형이 사용법을 빠삭하게 파악해서, 집에서 작업하다가 막히는 거 있으면 형한테 물어봐요. ‘이 기능 어떻게 하는 거야?’ 이제는 그래서 장비 주문을 아예 형 작업실로 해요.

웅희 장비 사면 당연히 이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건재 심지어 고장 나도 얘한테. 춘추한테 시동만 걸어주고 장작 몇 개 넣어주고 사라져 있으면 혼자 하고 있어요. 그러고 햄버거 같은 거 사주면 좋죠.

한주 저는 오늘 책을 가지고 왔는데 일부러 갖고 온건 절대 아니고요. <고어 자본주의>(사야크 발렌시아 저)라고 친구 책인데 표지 디자인이랑 이런 게 신기하게 생겨서 내용이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빌려 왔어요. 내용적인 부분은 아직 이해해가면서 읽고 있고, 난도가 있어서 천천히 하루에 서너 페이지씩 체크하는 느낌으로 보고 있어요. 술 마시면서 책 읽는 걸 좋아해서 그냥 위스키 한잔하면서 읽는 식으로 이 책을 소화하고 있어요.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최근에 김아일 씨 정규 앨범이 나왔어요. 최근에 음악 되게 좋다고 느낀 정도가 흥미로운 수준의 음악은 많이 있었지만 한 대 맞은 것 같은 음악이 없는지 꽤 오래됐어요. 김아일씨 앨범은 매우 좋고 저의 음악 취향에 정말 딱 맞춘 음악을 만들어주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사실 솔로 앨범을 되게 만들고 싶은데 제가 솔로 앨범을 낸다면 이런 스타일로 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뭔가 참고서처럼 이렇게 나와버려서 그 점도 아주 좋았고. 최근에 작업량이 너무 많다 보니 관성에 의해서 작업을 하게 된 경향도 조금 있었는데 이 앨범이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일깨워줬어요. 환기되어서 정신 차리고 다시 작업하자 하는 건강한 자극을 받았어요.

건재 저는 요즘 목재, 나무에 빠져있어요. 최근에 공간 음향에 관한 책들을 막 보다가 그게 지금 목재로 간 거죠. 나무가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리고 산도 다니다 보면 나무가 계속 눈에 보이잖아요. ‘등산로 바닥에 깔린 나무 마감 어떻게 처리한 거지’ 뭐 이런 게 궁금한 거죠. 비도 오고 그러는데 안 썩잖아요. 네, 나무를 좀 많이 보고 있어요. 관심이 생기는 게 왔다갔다하는데 최근엔 스튜디오 공사도 목공을 하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Q 이전 인터뷰에서 한주님이 꾸신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경찰관에게 붙잡혀 소지품을 내려놓았던 얘기였어요. 한주님에게서 나온 소지품 5가지가 흥미로웠습니다(오선지, 지갑, 적포도 맛 젤리, 일기장 그리고 스마트폰). 오늘 멤버별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5가지 물건을 골라 주시면 재밌을 것 같아요.

건재 연락을 해야 되는 사람이 있으니까 스마트폰. 춘추가 두고 간 핸드폰, 김한주가 맡겨둔 피크. 실제로 지갑 정리할 때도 우두두 나왔어요. 멤버들의 잃어버린 물건이라고 할게요. 그리고 웅희가 맡겨놓은 악기 같은게 있을 것 같아요. 요즘 껌을 계속 가지고 다니고 있어요. 담배를 끊은 이후로 많이 씹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실체 있는 물질은 아닌데 경찰한테 잡힌 상황이라면 왜 이렇게 됐지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 생각을 소지하고 있을 것 같네요.

멤버들 ‘수갑 괄호치고 죄송합니다’라고 써주세요. 수갑(죄송합니다)

 

 

한주 저는 ‘왓츠 인 마이 백’ 느낌으로 대답을 해볼게요. 고정적으로 작은 색 하나를 항상 가지고 다니긴 해요. 거기에 아이패드랑 애플 펜슬이 무조건 들어있어요. 제가 아이패드 없으면 못 살아서요. 메모하는 습관도 있고 곡도 아이패드로 쓰고 웬만하면 다 그걸로 하니까요. 그리고 그 시즌에 읽는 책 한 권. 지금은 좀 전에 소개한 “고어 자본주의”겠죠. 물병. 물병은 될 수 있으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데 설거지하려고 넣어놨다거나 하면 물 한 병 꼭 들고 다녀요. 저도 물을 많이 마시지만, 여자친구도 항상 물을 마셔서 둘 중의 한 명은 꼭 물을 가지고 다녀요. 네 번 째로는 청결 용품이라고 할게요. 손소독제나 구취제거제 같은 용품 가지고 다니고요. 마지막 하나는 지갑이나 에어팟 같은 생필품. 저야말로 진짜 소지품이 되어버렸는데 그게 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춘추 일단 안경 그리고 헤드폰이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시계가 꼭 필요하거든요. 손목 시계류 있잖아요 시간 확인하는 용도로. 마지막은 나무위키. 나무위키 읽는 거 좋아하니까.

멤버들 납땜. 수리용품해.

춘추 그것도. 그런 거 좋아 기계가 항상 먼저니까요.

 

 

웅희 저는 멤버들이 저를 나타낼 수 있는 물건을 하나씩 추천해주세요.

건재 유튜브 없으면 힘들지.

한주 캠코더 같은 거 하면 잘 맞지 않을까

웅희 DVX100이라고 해주세요.

건재 웅희는 목도리를 항상 가지고 다녀요. 이 시즌 되면.

웅희 목도리처럼 따뜻한 사람입니다.

춘추 수염. 스페어 수염. 웅희가 수염이 없었을 때가 있었어요. 수염이 있는 최웅희를 상상할 수 없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수염을 기르면서 인간상이 약간 바뀌어서 그게 중요한 요소겠다.

웅희 맞아요. 스페어 수염. 실제로 저한테 수염이 이제는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최웅희 2.0은 수염의 유무로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건재 축구공

웅희 공은 둥글다는 명언이 있죠.

마지막은 제가 오늘도 가지고 온 물건이 있는데 보여 드릴게요. 팬 분이 만들어주신 열쇠고린데 이게 4개 모이면 자석이라 서로 붙어서 실리카겔 심볼 모양이 돼요.

 

실리카겔 인스타그램

 

인터뷰 신샘이
인터뷰 사진 촬영 및 기획 슈퍼소닉 스튜디오 인스타그램
인터뷰 장소 가가77페이지(망원로 74-1 지하 1층) 인스타그램

 

Writer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신샘이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