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의 시간은 온전한 주체를 위한 시간이다." 프라이머리 프랙티스에서 진행 중인 전시<MANUAL>(8.27~10.29)의 서문에 적혀 있던 말이다. 나는 자문했다. 이미 해체되어 거의 사라져버린 '주체'를 이 시점에 다시 소환하다니. 이 전시는 대체 어떤 주체를 상정하고 있으며, 그 주체가 경험하게 될 전시란 무엇인가? 참여 작가 김민애, 홍승혜, 로와정의 작품을 통해 생각해보자.

<MANUAL> 전시 전경, Primary Practice(2022) 이미지 출처 © 조준용, CJY ART STUDIO

김민애의 작업으로 글을 열어보려 한다. 전시장 문 앞에 걸려 일종의 간판 역할을 하는 조각 ‘박쥐’(2022)를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두 점의 ‘새’(2022)를 추가로 만나볼 수 있다. 각각 박쥐, 공작, 까마귀의 형상을 구현했는데, 색이 들어간 투명 판재가 이용되어 전체적으로 무채색을 띠는 전시 공간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 작품은 전시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술 작품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는다. 김민애의 조각은 모빌, 화분, 조명 같은 인테리어 소품과 결합되어 있는데, 실제로도 인테리어 소품처럼 기능하며 전시장 분위기를 주도하려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들은 끝내 전시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작품이 외부 환경에 영향을 주듯, 외부 환경도 작품에 영향을 주어 '예기치 않은' 효과를 끌어내는 까닭이다. ‘박쥐’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흔들리고, 두 점의 ‘새’는 천장 조명과 홍승혜의 영상에서 발산되는 빛으로 인해 바닥과 벽면을 가로질러 그림자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효과들도 이미 계산된 것이니 여전히 작품의 자기주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진짜 변수는 작품을 몸소 감각하는 관람자다. 이곳에서 그가 자신의 시간이 기록된 신체를 경유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될지는 정말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어긋남의 광경 속에서 작품의 정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 김민애 ‘새’(2022), 폴리카보네이트, 아스팔트 콘크리트, 플라스틱 화분, 바퀴, 135 X 35 X 126 cm, (뒤) 로와정 ‘(이)머지’(2022), 전선, 구리선, 못, 80.3 X 116.3cm

김민애 작품에 응답이라도 하듯 홍승혜의 ‘관객’(2022)과 ‘move’(2022)는 관객이라는 행위자에 관해 질문한다. ‘관객’은 작가가 그간 주장해왔던 '유기적 기하학'의 전형과도 같은 조각 작품이다. 기하학적 그리드를 기본 단위로 하지만, 그 최종적인 형태 — 인간 형태 — 는 관객의 손길에 따라 해체되었다 조립되기를 반복하며 유기적으로 변화한다. 인간 형태가 되었을 때는 작품-주체가 되어서 자신을 관람하는 인간 관객을 마주 보기도 하지만, 흩어졌을 때는 그 시선의 힘을 잃고 속절없이 오브제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오직 인간만이 능동적인 힘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 관객 역시 자기 손으로 그리드들을 직접 조립/해체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암묵적인 룰에 따르게 될 뿐 아니라, 뒤에서 흘러나오는 영상 작품 <move>의 명령에도 순응하는 수동적인 존재자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위) 김민애 ‘새’(2022), 폴리카보네이트, 사슬, 120 X 120 X 50 cm, 가변설치, (중간) 홍승혜 <무브>(2022), 플래쉬 에니메이션, 개러지밴드, 02:50, 가변크기, (아래) 홍승혜 ‘관객’(2022), 자작나무 합판, 아크릴 페인트, 가변크기

<move>에서는 게러지 밴드로 작곡된 음악에 맞춰 'move'라는 영어 단어가 조립되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이 작업은 관객에게 '움직이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고, 또 그 지시가 실제로 수용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객이 거기에 순응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명령을 전달하는 단어마저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기본 형태를 잃고 자꾸 흩어진다. 인간 관객의 위치는 다시 한번 애매모호해진다. 명령에 수동적으로 따를 때 오히려 능동적인 행위자가 되기도 하고, 명령에 능동적으로 반할 때 수동적인 상태로 변화하기도 한다. 홍승혜의 작업에서는 능동과 수동의 경계가 흐려지며, 결국 관객은 전시의 영향 속에서 끊임없이 탈중심화되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인 행위를 끌어낼 수 있는 통일체로 상정된다.

그렇다면 관람자의 만남 속에서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것이 로와정의 ‘(e)merge’(2022)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이 작업은 크게 두 개의 캔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 벽면에는 띄어쓰기 없이 필기체로 흘려 쓴 영어 문장이, 오른쪽 벽면에는 문장은 사라지고 교정 기호만 남아있는 캔버스가 걸려 있다. 영어 문장은 전깃줄로 형성되어 있다. 전깃줄은 캔버스의 경계를 벗어나서 교정 기호 캔버스를 지나 홍승혜의 <move>에 전력을 제공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결과적으로는 김민애 작품의 '변수'들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영어 문장 캔버스와 교정 기호 캔버스를 겹쳐 볼 때 독해가 어려웠던 이미지는 마침내 텍스트로 변환되어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하게 되지만, 해석이 쉽지는 않다. 오독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으며 — 김민애, 홍승혜의 작품과 겹쳐졌을 때는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 해석 자체를 포기하고 작품을 이미지로만 접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독에서도 의미는 멈추지 않고 생성된다. 도리어 오독만이 작품의 자기주장에 맞서는 능동적 관람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어떤 루트를 택하게 될지는 전적으로 관람자에게 달려 있다. 전시는 대화의 장을 열어줄 따름이다.

(왼쪽) 홍승혜 ‘관객’(2022), 자작나무 합판, 아크릴 페인트, 가변크기, (우) 로와정 ‘(이)머지’(2022), 전선, 구리선, 못, 80.3 X 116.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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