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에 배우 모니카 비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니카 비티는 <정사>(1960), <밤>(1961), <일식>(1962), <붉은 사막>(1964) 등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으로 유명한만큼, 많은 관객들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을 떠올리는 2월이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유럽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예술 영화’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리는 느린 호흡과 전개, 명확하지 않은 줄거리 등의 특징을 품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명확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모호함은 예술만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닐까?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건 정해진 서사가 아니라 연이어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주는 감흥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구축한 세계는 볼수록 해석하는 재미가 크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마음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본다면 흥미로운 경험이 될 거다. 미학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에 있다고 평가받아 온,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오른쪽)과 그의 페르소나 배우 모니타 비티(왼쪽), 이미지 출처 – vanityfair

 

<정사>

‘안나’(레아 마사리)와 ‘산드로’(가브리엘르 페르제티)는 연인 사이이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고, 안나는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안나는 친구 ‘클라우디아’(모니카 비티)와 몇몇 친구들을 불러 함께 요트를 타고 여행을 간다. 그러나 여행 중 안나가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다 함께 안나를 찾지만, 안나의 작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산드로와 클라우디아는 함께 안나를 찾는데, 그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다. 클라우디아는 산드로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에 즐거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안나를 찾으면서도 안나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정사>(1960)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원제인 ‘L'Avventur’는 ‘모험’을 뜻한다. 여럿이서 함께 물리적인 여행을 떠나는 동시에, 친구의 연인을 사랑한다는 두 가지 모험을 모두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모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관객의 자유다. 안나의 실종으로 스릴러처럼 시작된 영화이지만, <정사>가 집중하는 건 안나를 찾는 이들의 감정이다.

클라우디아는 산드로와 사랑에 빠지고 불안해한다. 연인이 있음에도 사랑을 시작한 산드로이기에, 나와 사랑을 시작해도 새로운 누군가와 사랑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드는 건 당연해 보인다. 사라진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졌고, 막상 친구를 찾았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상상하기 어렵다. 이미 시작된 사랑 앞에서 안나가 나타나고 산드로가 안나에게 돌아간다면, 그때 가장 먼저 들 감정은 무엇일까?

산드로와 클라우디아는 함께 건물 위로 올라가 종을 치고, 어딘가에서 마치 응답하듯 종소리가 들린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클라우디아는 자신이 종을 치자 대답이 돌아온 것 같다고 말한다. 침묵이나 외면조차도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게 사랑이다. 오해와 착각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사랑이 시작된다. 아끼던 이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사랑이 시작되는 등, 사랑이라는 본능은 쉬지 않고 작동된다. 60년대 영화인 <정사>나 현재나 사랑에 대한 혼란한 사연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차마 남들에게 말할 수 없지만, 사랑이라고 믿는 감정이 여기저기 범람 중이다.

 

<밤>

‘조반니’(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유명한 작가다. 조반니는 아내 ‘리디아’(잔느 모르)와 함께 병원에 입원한 친구 ‘토마소’(벤하드 위키)를 찾아간다. 병원에 다녀온 후 조반니와 리디아는 조반니의 출간 기념 파티에 참석한다. 리디아는 먼저 행사장을 빠져나와서 혼자 거리를 걷는다. 리디아는 혼자 걸으면서 여러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밤>(1961)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작품인데, 흥미롭게도 <밤>에서 토마소를 연기한 배우 겸 감독 벤하드 위키가 연출한 <미라클 오브 말라키>(1961)가 같은 해에 같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주연을 맡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이탈리아의 국민 배우라고 할 수 있는 배우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신인배우들에게 주는 상을 그의 이름을 따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이라고 부른다. (링크) 잔느 모르는 누벨바그 감독들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배우로,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오슨 웰즈, 루이스 부뉴엘, 자크 드미, 루이 말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쥴 앤 짐>(1961)에서 해맑게 웃으며 뛰던 카트린을 연기하던 잔느 모르는 <밤>에서 리디아를 연기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걷는다.

내 옆에 있는 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느끼는 것만큼 미묘한 감정도 없을 거다.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고, 함께 많은 추억을 공유했지만 낯설어지는 기분. 함께 하고 있지만 멀어지는 기분 앞에서, 어쩌면 변한 게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인지 의심해보기까지 한다. 리디아가 선택한 건 걷는 일이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해본다. 왜 이렇게 변한 것이고, 변한 지금이 과연 맞는 것일지.

리디아는 결국 어떤 선택에 도달한다. 그 선택에 대해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디아가 걸음걸음마다 무수히 많은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다. 관계에 대해서는 당사자들만 알 수 있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리디아가 앞으로 견뎌야 할 밤은 길기에, 이제 자신의 길을 가기로 한다. 파티 장면에서 카메오로 등장한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책 제목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인용하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웃음과 냉소를 뽐내며 내 갈 길을 가면 될 일이다. 내가 한 선택이라면, 그 선택 이후의 밤은 편하고 아름다울 거다.

 

<붉은 사막>

‘줄리아나’(모니카 비티)는 자동차 사고 이후로 병원에 있다가 퇴원한다. 사고 이후로 줄리아나는 늘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다. 줄리아나는 남편과 아들과 지내면서도 좀처럼 평화를 찾기 힘든 상황으로, 남편의 공장에 갔다가 남편의 동료 ‘코라도’(리처드 해리스)와 가까워진다. 코라도는 줄리아나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둘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진다.

<붉은 사막>(1964)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첫 번째 컬러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1) 속 안개와 바다를 보면서 <붉은 사막>을 떠올린 관객도 있을 텐데, <헤어질 결심>의 김지용 촬영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박찬욱 감독이 레퍼런스로 <붉은 사막>을 권했다고 말한 바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다큐멘터리로 커리어를 시작한 감독인 만큼, <붉은 사막>은 극영화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시선으로 찍은 작품처럼 보인다.

<붉은 사막>은 배경이 되는 공업단지와 자연을 대비해서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환경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오직 발전만을 외치는 사람들 사이로 세상은 삭막한 사막이 되어간다. 줄리아나와 일행들이 바라본 바다는 안개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개발을 생각할 동안, 안개 속에 감춰졌던 바다는 결국 오염되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줄리아나가 교통사고 이후 겪는 혼란은 환경 문제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줄리아나가 이상하다고 말할 뿐,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줄리아나는 자신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할지 묻고, 코라도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다. 무엇을 보고 살지 본인이 결정해야 하지만, 사회가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관점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줄리아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도망가는 길의 끝은 사막일까 바다일까, 다시 돌아 공장일까? 줄리아나와 자연이 함께 맞이할 끝에 평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욕망>

‘토마스’(데이빗 헤밍스)는 모델들과 작업한 패션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이지만,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작업은 일상에서 포착한 순간을 예술 사진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자신의 사진집을 작업 중인 토마스는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다가 어떤 연인을 발견한다. 그는 멀리 나무 뒤에 숨어 두 사람이 안고 있는 모습을 비롯해 여러 장면을 찍는다. 토마스를 발견한 ‘제인’(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은 그를 쫓아 필름을 달라고 하지만, 토마스는 자신이 사진작가라고 소개하며 나중에 주겠다는 말만 할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자신의 집 앞에 와 있는 제인을 발견하고, 제인과 협상 뒤에 필름을 확대해 살펴보면서 사진에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욕망>(1966)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으로, 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단편 소설 ‘악마의 침’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영화의 원제는 ‘Blow up’으로 사진을 확대하는 것을 뜻한다. 영화 뒷부분에 밴드 ‘야드버즈’가 공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미 페이지와 제프 백이 함께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선물처럼 느껴지는 장면이다.

사진은 맥락의 예술이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이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토마스가 찍은 제인과 연인의 모습은 사진만 봐서는 아름다운 순간 같지만, 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모습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순간이다. 사진을 통해 순간은 영원이 된다. 분명 방금 지나간 순간이지만 사진에 찍히는 순간 영원한 게 되고,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영원의 속성이 사진을 피하는 이유가 된다. 사진작가는 어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지 연구하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는 얼굴에 하얀 분장을 한 무리가 등장한다. 마지막에는 이들이 마임으로 테니스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의 마임을 실제처럼 바라볼지 허구로 바라볼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굳이 마임이 아니어도, 내 상황을 바라보는 상대의 마음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토마스에게 벌어진 일 중 무엇이 실제인지는 관객도 확신할 수 없다. 믿을 것인지,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관객의 마음에 달려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보여준 장면들을 확대해서 살펴볼 것인가? 관객의 선택이 영화를 완성하게 될 거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