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긴 러닝타임의 아시아 영화’를 소개하면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2015)를 언급한 적 있다. (링크)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5시간이 넘는 영화인 <해피 아워> 이후로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하며, 일본과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다. <아사코>(2018)는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연출작에 각본으로 참여한 <스파이의 아내>(2020)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칸 영화제 각본상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고, <우연과 상상>(2021)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는 등 한동안 전 세계 각종 시상식에서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단연 대화다. 대화가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누구나 인지하고 있지만, 대화로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는 흔치 않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화에서 돋보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백이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대화 속 여백 안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관객들도 영화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영화와 관객이 맞닿게 된다. 대화로 만들어낸 특별한 서정을 느낄 수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2018년 이후 각본을 쓴 작품들을 살펴보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이미지 출처 - imdb

 

<아사코>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어느 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와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 아사코의 사랑은 점점 깊어지는 중에 바쿠는 마치 자신이 다가왔을 때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다. 그가 사라지고 2년 뒤, 오사카를 떠나 도쿄의 카페에서 일하고 있던 아사코는 근처 회사에서 일하는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마주한다.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를 보며 아사코는 놀라고, 이후 그를 피해 다닌다. 료헤이의 구애로 둘은 결국 연인이 되고, 아사코는 우연히 바쿠의 소식을 듣게 된다.

<아사코>(2018)는 시바사키 토모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지만, <아사코>가 보여주는 사랑의 풍경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위태로워 보이는 사랑에 기꺼이 뛰어들기도 하고, 평화가 보장되어 보이는 사랑으로부터 단숨에 도망치기도 한다. 사랑 앞에서 ‘합리적’이라는 단어는 내세울 수 없는 말이 된다.

연인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과거에 사랑했던 이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할 때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거다. 만약에 나와 닮은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면 나를 떠나 그 사람에게 갈 거라고 상상할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젠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건, 관계의 가장 근본이 되는 믿음을 위태롭게 방치하고 모른 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이 아니어도 곁에만 있어 주면 좋다는 사랑 노래의 가사처럼, 료헤이는 아사코가 어떤 이유든 간에 옆에 머물러주는 것에 만족하고 헌신한다. 하나의 사랑이 끝난 뒤에 마주한 나는 이전과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가 끝난 뒤, 아사코와 료헤이에게 묻고 싶어진다. 사랑 후에 당신들에게 남겨진 건 무엇이냐고.

 

<스파이의 아내>

1940년의 일본, 무역회사를 운영 중인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사업을 위해 만주에 갔다가 일본군이 꾸미고 있는 끔찍한 계획을 알게 된다.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남편이 찍는 단편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는 등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남편이 최근 자신 몰래 하는 일에 대해 의심과 걱정을 품는다. 한편, 헌병대에서 일하고 있는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유사쿠와 사토코 부부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의심하며 지켜본다.

<스파이의 아내>(2020)는 TV 방영을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후에 영화로 공개되며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연출을 맡은 구로사와 기요시는 <큐어>(1997), <도쿄 소나타>(2008), <산책하는 침략자>(2017) 등 공포부터 스릴러,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자신의 개성으로 드러내며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감독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학교에서 영화강의를 하기도 했는데, 그 인연으로 만난 감독 중 한 명이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다.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시대극으로, 하마구치 류스케는 각본에 참여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각본에 자주 등장하는 테마는 바로 ‘연기’다. <스파이의 아내>에서도 사토코는 남편이 촬영하는 단편 영화에서 배우 역할을 맡고, 일상에서는 자신이 유사쿠의 아내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한다. 매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건 인간의 숙명이다. 어떤 역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체화되고, 어떤 역할은 있는 힘껏 노력해야 겨우 소화 가능하다. 인간이 겪는 혼란은 자신이 맡고자 하는 역할이 시대적 상황 등으로 소화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유심히 봐야 할 건 ‘스파이’라는 장르 영화로서의 특징보다 ‘아내’로서 사토코가 겪는 심정 변화다. 사토코가 진정으로 맡고 싶었던 건 어떤 역할일까? <스파이의 아내>는 그 무엇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관객들은 영화가 공란으로 남긴 부분을 자신의 상상으로 채우며 영화를 완성해 나간다.

 

<드라이브 마이 카>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부부로, 언뜻 봐서는 이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어느 날 가후쿠는 오토의 외도를 직접 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의 연극제에서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주최 측의 요청으로 드라이버와 함께 다니게 되고, 드라이버 ‘마사키’(미우라 토코)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매일 함께 이동을 한다. 가후쿠는 운전할 때마다 오토가 녹음한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듣는 습관을 마사키가 운전하는 차에서도 계속 이어 나간다.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편으로, 짧은 단편소설을 하마구치 류스케의 스타일로 각색하며 3시간 분량으로 재창조한 영화다.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다.

가후쿠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한 무대에서 여러 국적의 배우들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수화 등 다양한 언어로 대사를 표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소통에 성공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과 가장 가까운 아내 오토와 제대로 소통하는 일 앞에서는 회피와 유예를 택할 때가 많다. 가후쿠와 오토는 분명 서로 대화를 나누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반드시 나눠야 할 대화는 배제된 것만 같다. 차를 운전하는 일이라면 가야 할 목적지는 분명하고, 연극 무대라면 주어진 동작도 명확하지만, 실제 관계에서 원활한 소통의 지점을 찾는 건 그 무엇보다도 어렵게 느껴진다. 가후쿠가 마사키가 운전하는 차를 타는 동안 겪는 모든 일들은 결국 누군가와 솔직하게 소통하기 위한 과정으로 느껴진다. 차를 몰고 가장 자주 가는 곳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듯이, 가후쿠와 마사키는 같은 목적으로 만나지 않았음에도 함께 같은 지점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우연과 상상>

<우연과 상상>(2021)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함께 일하는 ‘츠구미’(현리)로부터 최근 만나고 있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메이코는 츠구미가 만나는 이가 자신의 전 연인 ‘카즈키’(나카지마 아유무)라는 걸 알고, 그를 찾아간다. 제2장 ‘문은 열어둔 채로’는 결혼과 출산 이후 뒤늦게 대학에 들어온 ‘나오’(모리 카츠키)가 유일하게 가깝게 지내는 동기 ‘사사키’(카이 쇼마)로부터 자신을 낙제시킨 ‘세가와’ 교수(시부카와 키요히코)를 유혹해달라는 부탁을 듣고, 교수 사무실로 찾아가서 생기는 일을 다루고 있다. 제3장 ‘다시 한번’은 바이러스 때문에 네트워크가 마비되고 우편을 활용하는 시대가 배경으로, 오랜만에 학창 시절 살던 동네에 온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우연히 만난 ‘아야’(카와이 아오바)와의 재회에 기뻐한다.

<우연과 상상>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국내에는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늦게 개봉했지만 실제로는 먼저 제작된 작품이다. 세 개의 단편을 묶은 작품으로, 세 작품 모두 ‘우연과 상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러닝타임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게 다른 만큼, 5시간이 넘는 <해피 아워>와 3시간에 가까운 <드라이브 마이 카>와는 다른 매력의 하마구치 류스케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삶의 많은 순간에 우연과 상상이 함께 한다. 사람이 맺는 인연에 있어서, 우연은 경우에 따라 잊지 못할 인연이 되기도 하고 악연이 되기도 한다. 상상 또한 치유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불행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우연과 상상>은 분명 소품처럼 느껴지는 일상의 이야기이지만, 보고 나면 그 울림은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여운이 크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우연과 상상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만큼 희망적인 메시지도 없을 거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차기작은 아직 알려진 게 없지만, 그가 앞으로 보여줄 우연과 상상은 분명 일상적인 순간임에도 마법처럼 느껴질 거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