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은 남편과 이혼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고 그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말을 타러 간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우린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사강은 결별 사유로 남자의 무심함이나 결격함을 꺼내지 않았다. 그보다는 엇갈리는 취향과 감내할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을 꼽았다. 대외적으로 헤어진 배우자를 보호하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보다 오히려 그들 바깥에서 찾아온 위기에 신음하는 커플을 왕왕 목격한다. 타오르는 사랑의 열망은 금세 사그라들고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에 산적한 문제들을 버텨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법일까? 보통 영화에서도 로맨스의 낭만과 공상을 주목하지만 때때로 지독한 현실에 막혀 허덕이는 연인들의 속사정에 주목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달콤한 연애를 뒤로하고 이별을 택한 연인들을 비춘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블루 발렌타인>

사랑은 당치 않게도 쉽게 변한다. 수많은 통속극이 변해가는 관계를 연구하는 이유도 알만하다. 한 가지 이유로 사랑에 빠진 연인이 수없이 다양한 걸 꼬투리 삼아 다투고 헤어지니까. 그 불가사의함이 자꾸만 지나간 사랑을 되살려낸다. 다 망가진 사이를 붙들고 늘어지게끔 옭아맨다. <블루 발렌타인> 역시 불붙듯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밀려드는 위기에 봉착해서 무너져가는 이야기다.

‘신디’(미셸 윌리엄스)와 ‘딘’(라이언 고슬링)은 부부다. 한때 사랑했지만 두 사람은 점차 관계가 시들어가는 걸 느낀다. 딘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신디를 가까스로 설득해 교외 나들이를 떠난다. 영화의 특이한 점은 두 사람이 이별로 향하는 여정을 보여주면서, 그사이에 둘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틈입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플롯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관계의 결정적인 순간만 늘어놓는 방식으로 배치해서 속 쓰린 두 사람의 내상이 얼마나 큰지 부각한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떠난 여행은 어느 순간부터 처절한 싸움으로 돌변하고, 지나간 날이 눈부시게 아름다울수록 이별의 낙차는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두 사람은 촉망받는 미래를 지닌 젊은이였지만, 결혼 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결혼이 행복의 시작이 아닌 몰락의 전초가 되었다는 패배감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망가뜨린다.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곤궁한 상황이 둘 사이를 번번이 가로막는다. 경제적인 곤란함이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을 향한 의심과 불만으로 피어나는 꼴이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이 서로의 시야를 알록달록한 컬러로 물들였지만, 사랑이 식어가자 점점 현실은 모노 톤으로 뒤바뀐다. 뒤늦게 상대가 사랑에 빠질 법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따져보는 장면은 잔인하다. 쉽게 말해서 <블루 발렌타인>은 사랑만 보고 택한 결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다.

<블루 발렌타인>은 이별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운 작품이지만, 역설적으로 두 배우의 열연 때문인지 그마저도 생생하고 격정적이라 보는 내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라이언 고슬링과 미셸 윌리엄스는 지치고 피로한 결혼 생활의 고통을 온몸으로 토해내며 누가 봐도 고통스러운 이별 이야기를 완성한다. 사랑이라는 화학작용이 얼마나 예민하고 복잡한지, 어떨 때는 얼마나 무심하고 황폐한 지가 두 사람의 표정에 그대로 묻어 나온다.

 

<연애의 온도>

시작부터 욕설로 시작한다. 서로를 비난하는 한때의 연인들은 주먹을 휘두를 각오로 달려든다. 사랑이 막 피어날 때의 설렘과 간지러움은 온데간데없고, 꽁꽁 언 권태가 냉동고에 가득하다. 때론 방망이를 들고 권태를 두들겨 패며 속풀이를 하지만 골이 팬 사이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다. <연애의 온도>는 긴 시간 비밀연애를 해온 동희와 영의 변을 들어보며 시작하는 작품이다.

헤어지자는 말은 처음만 어려웠지 어느 순간부터는 습관처럼 내뱉는다. 점점 더 수위를 높여가던 싸움은 이제 주위 눈치도 보지 않고 막말을 남발한다. “너 같은 엑스는 정말 처음”이라는 비난에 “이런 엑스 같은 엑스가”라는 모욕으로 되받아 치는 식이다. 사실 그들의 연애는 누구보다 달콤했다. 직장 사내 커플로 종일 붙어 다니며 설렘과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점차 내려가던 온도는 영하권을 넘나들기 시작했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결별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우린 왜 굳이 이런 전쟁 같은 시간을 견디면서까지 사귀어야 할까? 그렇게 허탈해지면 더는 싸움도 이어가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진짜 이별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연애의 온도>는 사랑이란 속절없이 시작되지만, 이별은 엄청난 노력 없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영’과 ‘동희’는 떨어지는 시간 없이 매일 보고 싸워야 하는 운명이기에 더 큰 통증에 시달린다. 두 사람의 연애를 아는 동료들은 질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소문을 가감 없이, 아니 더 과장해서 전달하고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며 구경꾼들을 만족시킨다. 연애 탓에 일은 뒷전으로 밀리고, 두 사람만의 것이 되어야 하는 연애는 흔한 풍속도로 굳어져 간다. 이렇게 힘들고 보잘것없는 연애를 왜 시작했을까? 왜 끝을 인정하고 못 하고 집착할까? 영화는 지극히 사실적인 상황과 구어체의 대사로 살풍경한 연애의 실체를 까발리는 동시에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짚어내면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중간중간 틈입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인터뷰도 그들의 이별이 흔한 연인들의 갈등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데 일조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신은 관계 회복을 위해 방문한 놀이공원에서 나온다. 거기까지 가서 숨 막히게 싸우던 두 사람은 결국 동시에 이별이라는 답안지를 작성한다. 철철 넘치던 기운이 빗속에 씻겨 내려가면서 지치고 우울한 몰골이 드러난다.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은 이제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고 항복한다. 좋았던 만남이 미화될 때까지 두 사람은 연락을 끊고 지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리스>

<모리스>의 배경은 영국 옥스퍼드다. 학우인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사교 클럽에서 처음 만나 우정을 쌓는다. 케임브리지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향한 끌림에 당황하던 두 사람은 몇몇 찬란한 순간을 남기고 헤어진다. 영화는 취향을 나누고 지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장면을 공들여 연출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어울리고 근사한 관계인지 보여주는 신이지만, 당시에 법으로 금지된 동성애를 택하기에 그들이 가진 게 얼마나 많은 지 보여주는 의도도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게 다 잘 맞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환상적인 궁합을 지닌 두 사람이 공개적인 연인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은 섬세한 스킨십처럼 야릇한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삶에 관한 질문으로 가득 찬 대사들이 돋보인다. 씨실과 날실이 맞물리는 것처럼 평범한 대화 속에서 성적 긴장감을 뽑아내는 연출이 세밀하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향후 인생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사랑하지만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슬며시 일그러지는 표정으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드러낸다. 미세한 손짓 하나에도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충격을 받고, 건네는 말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해서 단 한 장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클라이브가 제 머리카락을 만지는 모리스를 갑자기 껴안는 장면은 정신적인 교감으로 이뤄낸 팽팽한 긴장과 떨림이 어느 순간 임계치에 다다라 터져 나오는 장면이다.

결국 고민하던 두 사람은 헤어짐을 택한다. 정확하게는 클라이브가 모리스를 찬다. 둘의 학우이자 촉망받는 정치 신인이었던 리즐리가 동성애 혐의로 위기에 처하면서 클라이브는 불안을 느끼고 모리스를 멀리한다. 법원은 리즐리에게 동물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하고, 클라이브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성애를 향한 사회의 냉담한 시선을 몸소 체감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클라이브는 서둘러 결혼할 여성을 찾아낸다. 클라이브는 사랑 대신 사회적인 경력과 인정을 택했다. 그에 반해 모리스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자였기에 심각한 고통을 받는다.

클라이브는 모리스에게 정신과 영혼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제시한다. 자신과 모리스는 육체적인 쾌락으로 이어진 관계이기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장담한다. 주위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물의를 일으키며 사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사랑하면서도 동성애를 죄악시한다는 점에서 실존적인 모순에 직면한 인물이다. 욕망보다는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믿기에 육체적 욕망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모리스를 더 멀리한다. 모리스는 클라이브와 갈등을 빚자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려고 시도한다. 주치의를 찾아가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을 바꿔보려고 시도하는 등 사랑하는 이를 부정하기보단 자신을 책망하며 잊어보려고 분투한다. 모리스는 의사에게 리슬리 경과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주치의는 악마의 유혹을 운운하며 치료를 거부한다. 결국 모리스는 정신과를 찾아가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최면 요법을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긴 치료에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오로지 클라이브뿐이었다.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모리스에겐 분열되고 일그러진 자화상이 아른거린다.

1910년 영국은 인간 본성 따위를 고려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격식과 품위를 차리느라 고통받는 어깨를 다독일 여력이 없었다. 거기다가 목전에 다다른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어서 사회는 더 보수적으로 경직됐다. 젊은 엘리트는 정신적인 무장을 강요받았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고독과 정체성은 입에 꺼내기 버거운 속 편한 소리였고, 신념의 문제는 오직 정치와 전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고고한 이들의 독차지였다. 무엇보다 당시 종교는 감정을 마음대로 통제하려고만 들었지, 개개인을 위로하는 덴 미숙했다. 학교, 사회, 파티장 그 어디에서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소수자는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 풍경화처럼 서정적이고 우아한 형상을 띤다. 고즈넉한 음악과 나지막한 배우들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고, 영국 사회를 그려낸 풍경 묘사도 감정의 격랑에 흔들리는 심상과 긴밀하게 맞물린다. 영화는 목숨이 위태롭고 가진 걸 다 버려야 함에도 하인 알렉과 함께 떠나는 모리스를 비추며 끝이 난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처럼 주인공이 본연의 자신을 알아보고, 사랑에 투신하는 모습을 지지해준다. 모리스를 떠나보낸 클라이브는 추억에 잠긴 것처럼 떠나간 그의 자취를 쫓지만, 이제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안다. 클라이브는 어여쁜 아내와 고풍스러운 가구에 둘러싸여 그만의 삶을 살아간다. 한때 모든 걸 줄 수 있었던 사이가 어찌도 이리 다른 삶을 살게 된 걸까. 우리의 이별이 그런 것처럼 그들에게도 몇 번의 장난 같은 우연과 고쳐낼 수 있었던 미련이 남아버렸다. 회한을 다시 들여다보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 속에 가장 찬란한 시절이 있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지나간 사랑을 되돌아본다.

 

메인 이미지 영화 <블루 발렌타인>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