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음악가의 삶은 대중의 관심을 독차지해왔다. 감춰진 사생활이 주로 도마 위에 올랐다. 고상한 작품만 보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음악가의 사연은 때로는 예술가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음악가의 삶이 비극에 가까울수록 더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추락의 낙차는 더 컸고, 아티스트의 신비로운 음악도 적나라한 일상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람 저 사람 입에 오르내리며 근거 없이 떠도는 자극적인 소문이 아닌, 진정한 음악가의 삶을 비춘 글은 드물게 나왔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 나이에 천재 소리를 들으며 불세출의 걸작을 남겼지만 순탄치만은 않은 삶을 살았던 세 음악가의 삶을 정밀하게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 본문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임스 개빈 <쳇 베이커>(2007)

영화 <리플리>에는 술집에서 주인공이 쳇 베이커를 흉내 내며 'My Funny Valentine'을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주위 공기가 느슨해지면서 미국 서해안의 맑디맑은 하늘을 닮은 쿨 재즈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영화 배경은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의 캄파니아 지방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미국의 트럼페터 쳇 베이커가 스크린을 장악한다. 1950년대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렸던 쳇 베이커는 나른하고 감각적인 선율로 수많은 여성 팬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마일즈 데이비스와 함께 쿨 재즈의 아이콘으로 불렸으며 1954년 캘리포니아에서 녹음한 앨범 <Chet Baker Sings>는 지금도 수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다. 특히 다른 재즈 뮤지션과 다르게 언제라도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하고 중성적인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소질이 한국인의 정서와 잘 부합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재즈 에세이 <재즈의 초상>에서 쳇 베이커를 이렇게 묘사한다. "쳇 베이커의 음악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난다. 재즈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뮤지션은 수없이 많지만, 청춘의 숨결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끼게 하는 연주자가 달리 있을까? 베이커가 연주하는 곡에는 이 사람의 음색과 연주가 아니고는 전달할 수 없는 가슴의 상처가 있고 내면의 풍경이 있다." 하지만 이런 찬사와 달리 쳇의 삶은 그의 음악을 즐겨 듣는 팬마저 무색하게 할 정도로 추악하다. 작가 제임스 개빈이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으로 남긴 <쳇 베이커> 전기의 부제는 '악마가 부른 천사의 노래'다.

<쳇 베이커> 전기는 쳇의 음악과 삶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무엇보다 음악 평론가 김현준 씨의 번역이 훌륭해서 재즈의 초기 역사부터 배울 수 있는 재즈 입문서이기도 하다. 쳇의 삶을 폭력적으로 요약하자면 공연과 여자, 마약과 폭력 그리고 불안과 몰락이다. 쳇은 자신의 곡절 많은 삶에서 이중인격에 파렴치한 악역으로 열연했다. 무대 위에서는 바스러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로 여심을 울렸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약물 중독에 극심한 여성 편력까지 안하무인의 무뢰한이 되었다. 쳇은 쿨 재즈의 대표적인 트럼페터이자 보컬리스트로 인기 가도를 달렸지만, 끊이지 않는 사생활 문제로 명예를 실추했다.

쳇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고, 도대체 안정을 취하기 어려운 가족 곁에서 자랐다. 10대 후반에 우연히 악기를 접하고 연주에 재미를 붙일 무렵 군에 강제 징용되어 전쟁을 통과했다. 스무 살이 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연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잘생긴 외모 덕이라고 폄하를 당했다. 거기에 심약한 기질과 문란한 사생활에 결정적으로 마약에 손을 대면서 궁지에 몰렸다. 뮤지션이 음악이 아닌 범죄로 이슈 몰이나 하니 동료 뮤지션들은 쳇을 대놓고 무시했다. 특히 마일즈 데이비스는 쳇을 동네 꼬마라도 다루듯 했고, 쳇도 평생 마일즈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화려한 기교와 힘을 중시하던 미국의 '밥' 재즈 신에서 쳇이 음악적으로 자신을 내보일만한 틈은 없었다. 미국 땅에서 인정받지 못한 쳇은 결국 유럽으로 향했다. 그는 오직 마약 살 돈을 구하기 위해 무리한 유럽 투어를 소화했다. 쳇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독일, 네덜란드, 파리와 같은 유럽의 도시에서 보냈다. 미국인들이 힘과 기교의 재즈를 선호하는 반면, 유럽 재즈 신은 멜로디와 느낌에 더 높은 가치를 두어 쳇 베이커의 서정성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쳇은 우수에 젖은 목소리와 서정적인 멜로디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그 명성을 약물로 다 까먹은 케이스다. 커리어 말미에는 잘생긴 얼굴이 다 무너지고 치아에 크게 다치면서 은퇴 위기에 몰린다. 하지만 쳇은 트럼펫을 불기 어려운 시절에도 젊은 여성과 만나 데이트를 했고, 빚을 내서라도 마약을 했다. 오로지 마약 할 돈을 구하기 위해 노예 계약에 가까운 조건을 받아들이고, 조악한 녹음과 공연을 수용했다. 자식에게는 옷 살 돈 한 푼 건네지 않을 만큼 가족에게 끝까지 비겁했다. 그는 약물 문제로 커리어를 스스로 훼손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쳇은 나이를 먹고도 집도 절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환각의 틈에 기생했다. 끝내 네덜란드의 한 호텔에서 투신할 때까지 마약중독자였다. 재즈의 역사는 길고 길어서 세월은 쳇의 추악한 삶을 잊었다. 그 대신 트럼펫을 무릎에 대고 의자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얇게 연주하는 한 뮤지션의 위태로운 이미지만 남겨뒀다. 최근에는 에단 호크가 쳇 베이커를 연기한 영화 <본 투 비 블루>가 개봉하면서 구제 불능에 가까운 쳇의 삶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2011)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작가다. 한 뮤지션의 파멸과 죽음을 그린 소설 <몰락하는 자>는 실제 뮤지션 글렌 굴드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면서 허구와 실재를 오가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천재 피아니스트를 만난 평범한 신인은 모차르트를 만난 살리에리처럼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절망한다. 상대적인 박탈감에 젖은 범인은 천재와의 만남을 계기로 점차 파멸해간다. 예술의 위대함을 알아본 자의 비극이다. 예술이 지닌 완고한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감이 한 인물을 사지로 몰아넣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1980년대 오스트리아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소설의 얼개가 파편적이고 허구와 실재를 넘나드는 형식이라서 배경지식 없이 즐기기 버겁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경제 침체와 정부의 완고한 통제로 나라 전체가 경직되어 있었다. 실업자가 지속해서 늘면서 자살률은 치솟았고 예술은 사회 분위기에 걸맞게 침체했다. 과거 클림트와 에곤 실레, 프로이트와 베토벤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작가는 당시 동구권 변혁의 분위기를 정통으로 맞은 오스트리아가 처한 상황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소설은 화자의 오랜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며 시작한다. 화자는 친구였던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먼 길을 떠난다. 그는 부유한 재력가의 아들이지만, 고국을 경멸하기에 도망치듯 스페인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오스트리아를 경멸한 이유는 예술가를 배척하는 정부의 태도에 기인했다. 화자는 과거에 죽은 베르트하이머와 빈의 한 음악학교에서 동문수학한 바 있는데, 당시 두 사람은 글렌 굴드라는 걸출한 천재와 수업을 받았다. 이것은 두 사람에게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글렌 굴드는 13살 나이에 그 어렵다는 베토벤 협주곡 4번을 완벽하게 연주하며 동료들을 압도한다. 강렬한 태양이 모든 것을 삼키듯, 압도적인 재능은 음악가를 꿈꾸던 두 청년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글렌 굴드는 무슨 심술이 동했는지 베르트하이머와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가 그를 ‘몰락하는 자’라고 칭한다. 이 말은 마치 주술처럼 베르트하이머를 휘감으면서 그가 나락에 빠지는 데 일조한다. 화자는 장례식에 참석한 후에 과거를 회상하며 베르트하이머의 고통을 다시금 떠올린다. 자살로 끝난 친구의 족적을 더듬으며 그의 삶이 보잘것없이 흩어지지 않도록 기록을 시작한다. 베르트하이머의 비극적인 죽음은 알게 모르게 화자의 삶까지 이어지며 몰락의 저주는 오스트리아의 추운 겨울처럼 그를 옥죈다.

다음은 소설의 첫 문장이다. "우리의 친구이자 금세기 최고의 피아노 대가 글렌 굴드도 쉰한 살까지 밖에 살지 못했지..." 이 문장에는 어쩐지 비굴한 자조가 섞여 있다. 타고난 재능을 지닌 이도 결국 쉰한 살에 불운한 죽음을 맞았다는 건 화자에게 위안으로 다가온다. 자신처럼 평범한 인간이 간신히 버티며 사는 것과 달리 화염과 함께 재가 되어버린 친구를 향한 시기가 담겨있다.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소설의 배경음악이다. 유튜브로 글렌 굴드의 스튜디오 연주를 검색해보면, 마치 그랜드 피아노에 용해한 것처럼 한 몸이 된 글렌 굴드의 굽은 등을 마주할 수 있다. 어딘지 모르게 맹목적이며 병적이기까지 몸짓이 섬뜩하다. 화면은 글렌의 연주를 목격하는 관객의 얼굴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재능에 소외당한 두 청년은 역사에 소외당하고 오직 천재의 굽은 등만 기록으로 남았다.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2016)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은 소련의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에서 분기점이 되었던 세 지점을 비춘다. 1936년,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를 스탈린 앞에서 선보이지만, 부르주아 취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궁지에 몰린다. 1948년, 오직 창작에 몰두하며 조용히 살던 쇼스타코비치가 본보기로 소련 정부의 검열 대상에 오르면서 고통을 받지만, 이듬해 방미 기간에 스탈린을 칭송하는 인터뷰를 남기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1960년, 스탈린이 죽고 새로운 시대를 맞는 소련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지속적인 공산당 가입 권유를 받지만 무시한다. 하지만 결국 당국의 압박에 굴복하여 동료 예술가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남기며 충성 맹세를 하며 입당한다. 이렇게 천재 음악가는 고비마다 오직 음악가로 남기 위해 모욕을 견딘다. 줄리언 반스는 혁명의 시작부터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가 어떻게 살아남는지, 야만의 시대가 종언하는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핀다.

쇼스타코비치는 당대의 정치 혁명가 앞에서 형식주의자로 몰려서 고생을 했다. 당국은 그의 실험성 짙은 음악이 대중을 선동할까 봐 예의 주시했다. 쇼스타코비치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순수함을 증명해야 했다. 이렇게 살아본들 무엇하냐는 동료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오직 예술을 하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다른 이들이 보면 굴종에 가까운 타협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모욕을 견뎌내며 음악에만 몰두했다. 그는 비겁자로 불렸지만 그래서 살아남았고, 그 비겁한 속내를 음악에 녹이며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부커상을 받은 이듬해 본작을 썼다. 명성의 최고조에 올랐을 때 이런 실험적인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게 놀랍다. 한 개인의 속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탓에 징그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인간성을 탐구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천재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될 것이다.

 

메인 이미지 글렌 굴드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