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사랑, 자유, 평등, 박애. 모두가 잘 아는 단어다. 하지만 이 단어를 말로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면 그때는 더는 쉬운 단어가 아니다. 누구나 알지만 모두 다르게 이해하고 살아가는, 누구도 제대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 단어들이 오늘 다룰 다섯 작품의 주제다. 감독의 복잡한 이름처럼 영화까지 복잡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생소한 폴란드 출신의 감독이라는 이유로 영화마저 난해하지는 않다. 베니스, 베를린, 칸에서 모두 수상한 감독이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이 마냥 지루한 것도 아니다. '사랑'을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만 모두가 사랑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것처럼,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도 모두가 알고 있는 개념을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만들었던 두 편의 짧은 필름과 세 가지 색에 얽힌 세 편의 영화들을 소개한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바르샤바의 길거리를 떠돌던 청년 ‘야체크’(미로스라브 바카)는 이유 없는 살인을 결심한다. 그는 살인의 대상자를 탐색하고, 동네 경찰들을 확인하고 밧줄과 칼을 챙기면서 철저하게 살인을 계획한다. 이후 택시를 타고 가던 야체크는 택시기사(얀 테사르즈)를 살해한다. 변호사가 된 이후의 첫 번째 업무로 야체크의 재판을 맡게 된 ‘피토르’(크쥐시토프 글로비즈)는 재판에서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야체크는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는 것은 약간의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 제목의 의미에 충실한 이 작품은 두 번의 살인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카메라는 두 번의 살인 각각을 거의 1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보여준다. 단순히 두 번의 살인을 보여준 것 만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우리에게 살인에 관해 한참을 고민하게 한다.

TV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을 보고 우리는 죽어야 마땅할 놈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아마도 당신이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을 보는 동안, 택시기사를 처참히 살해하는 야체크를 죽어야 마땅할 인물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제 키에슬로프스키는 우리에게 공권력이 개인에게 행하는 또 다른 살인의 현장을 천천히 꺼내 보인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과연 두 개의 살인을 모두 지켜보고 난 후에도 우리는 두 살인 중 하나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여준다’는 것은 중요하다. 두 개의 살인에 대해 쓰인 글을 읽는 것과 두 개의 살인을 직접 목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서 우리의 위치는 언제나 관찰자이다. 그의 영화들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한 명 내지는 두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천천히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 경험이 주는 인상은 강렬하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우체국 직원 ‘도메크’(올라프 루바첸코)의 맞은편 아파트에는 연상의 독신녀 ‘마그다’(그리지나 자폴로프스키)가 살고 있다. 도메크는 매일 자신의 집에 있는 망원경으로 마그다를 훔쳐보고, 그에 대한 사랑에 빠진다. 매일 그의 주위를 몰래 맴돌던 도메크는 어느 날 마그다에게 자신의 행각을 들키게 되고, 도메크는 마그다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러나 마그다의 집에서 도메크는 자신의 사랑의 결실이 생각보다 보잘것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사랑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해 키에슬로프스키가 택한 두 인물은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도메크와 마그다. 두 사람의 모습에는 관음과 욕망만이 존재할 뿐이며 우리는 이들 사이에서 어떠한 로맨스도 발견할 수 없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이를 매일 지켜보고 맴도는 것이 순수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 키에슬로프스키는 본작을 크게 두 개의 파트로 구분했다.

첫 번째 파트에서 카메라는 도메크의 관찰자다. 도메크의 주변을 맴돌며 이 극단적인 사랑을 한쪽에서 오롯이 지켜보고 나면, 곧이어 카메라는 마그다의 관찰자가 된다. 도메크에게 상처를 주고 난 후에야 마그다는 도메크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도메크의 진심을 생각해본다. 도메크가 자신을 어떻게 봐왔었는지를 깨닫게 된 마그다에게 도메크는 어떤 존재가 될까? 키에슬로프스키는 한 시간 반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그저 사랑에 얽힌 두 사람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의 본질을 관객에게 설명해낸다.

 

<세 가지 색 : 블루>

세 가지 색 연작은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이자 프랑스 국기의 깃발 속에 남은 세 가지 색 파랑, 하양, 빨강이 의미하는 자유, 평등, 박애에 관한 이야기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대정신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줄리’(줄리엣 비노쉬)는 유명한 작곡가인 남편 ‘파트리스’(위그 케스테) 그리고 딸 ‘안나’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피크닉을 간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딸과 남편을 모두 잃게 된 줄리는 가족과 살던 집을 정리하고, 파리의 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무의미한 삶을 이어나가는 줄리의 주변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중 한 명은 파트리스의 동료 음악가이자 자신을 사랑해왔던 남자인 ‘올리비에’(베누아 레전트)다. 올리비에는 TV 뉴스에 출연해, 파트리스의 유작을 마무리지을 것을 선언하고 파트리스에게 숨겨둔 애인이 있었단 사실을 공개한다.

<블루>의 카메라는 무기력하게 파리를 떠도는 줄리의 모습을 내내 배회한다. 우리는 그저 줄리라는 인물 한 명을 천천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블루>의 첫 장면 이후로 줄리는 모든 장면에서 파란색의 세상에 둘러싸여 있다. 이 사실은 곧 줄리는 사고 이후 한순간도 자유를 잃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 없이 혼자만 남은 줄리는 이미 자유롭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개인의 자유를 항상 지니고 있었음에도 어떤 행동을 할 의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영화 <세 가지 색 : 블루> 트레일러

줄리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인다.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에서 처음부터 자유를 쥐고 있는 그녀가 이렇게 무기력하다는 것은 결국 본작이 단순히 자유의 가치를 찬양한다거나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가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대신에 키에슬로프스키는 자유라는 속성을 체화한 인물의 무너진 모습을 통해 자유라는 가치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질문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가 현대 유럽에서 설 자리가 남아있긴 한 걸까?

 

<세 가지 색 : 화이트>

폴란드인 이발사 ‘카롤’(즈비그니브 자마코브스키)은 프랑스인 아내 ‘도미니크’(줄리 델피)와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아내 도미니크에게 이혼당한 카롤은 심지어 재산까지 모두 빼앗긴 채 아내의 집에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길거리로 내쫓긴다. 노숙을 하던 카롤은 폴란드인 ‘미콜라이’(자누스 가조스)를 만나 폴란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미콜라이는 카롤에게 자살을 원하는 남자가 있으니 그를 죽여주면 거액의 돈을 준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여행가방 안에 몸을 숨긴 채 폴란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된다.

<화이트>의 시작에서 카롤과 도미니크의 위치는 작위적이다 싶을 만큼 불평등하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우연에 우연을 덧붙여가며 카롤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최악의 지점에 내려놓은 채 시작한다. 재치 있게도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작위적인 상황들에 설득력을 주기 위해 장르영화의 문법들을 훔쳐왔다. <화이트>는 블랙코미디이자 누아르 영화다. 그렇기에 이 상황들은 더욱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블랙코미디와 누아르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인물들 주위를 배회하는 카메라의 위치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당신을 마냥 즐거움 속에만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 가지 색 : 화이트> 트레일러

<블루>나 <레드>와는 다르게 <화이트>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닌 남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여자의 이야기다. 평등은 한 사람만을 두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루>의 줄리가 자유의 무가치함 속에서 죽어 있었다면, <화이트>의 카롤은 도미니크와의 관계에서 모든 평등을 빼앗긴 채 사회적으로 죽어 있다. 카롤은 어떻게 도미니크와 다시 평등한 관계를 되찾고 삶과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평등이 자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만약 두 사람이 다시 평등해진다면, 둘은 다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세 가지 색 : 레드>

법대생 ‘오귀스트’(장 피에르 로리)의 집 근처에는 대학생이자 패션모델인 ‘발렌틴’(이렌느 야곱)이 살고 있다. 두 사람은 가까이 살면서 끊임없이 마주치지만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집에 가던 길에 발렌틴은 개를 치는 교통사고를 낸다. 개의 목에 달린 표의 주소로 찾아간 발렌틴은 거기에서 은퇴한 판사(장-루이 트린티냥)를 만나게 된다. 사고 난 자신의 개를 알아서 해결하라는 판사의 말에 발렌틴은 자신이 개를 치료하고, 기르기로 한다. 목줄을 풀고 산책하던 개가 다시 판사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거기에서 발렌틴은 판사가 집안에서 이웃집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세 가지 색 : 레드>의 줄거리는 당혹스럽다. 오귀스트와 발렌틴은 가까이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마주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다. 또한 판사와 발렌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으로 점철된 난잡한 이야기다. 게다가 <블루>, <화이트>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느닷없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 형식이 곧 주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렇게 이어지기 힘든 존재들을 억지로 이어내는 과정을 통해 박애를 설명한다.

<세 가지 색 : 레드> 트레일러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우연 속에 있다. 우연으로 뒤덮여 있기에 이 영화는 더욱더 현실적이다. 우연 속에서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들이다. <블루>에서 우리는 하얀색과 빨간색의 상징을 발견할 수 있고, <화이트>와 <레드>에서 역시 다른 색깔들이 드문드문 등장한다. 결국 이 세 편의 영화들은 한 편의 영화이다. 그리고 <레드>는 형식과 결말을 통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 연결을 표현해낸다. 결말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이렇게 기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완전한 이야기를 해내는 영화는 드물다. 그 점이 우리가 세 가지 색 연작을 반드시 ‘목격’해야 할 이유다.

 

Writer

좋아하는 건 오직 영화 뿐이고 특히 68혁명 이전까지의 고다르 영화에 대한 광적인 팬이다. 스스로가 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철이 없다.

강정화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