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의 창궐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독서 시간이 부쩍 늘어난 기분이다. 바깥을 믿을 수 없는 요즘 같은 때엔 오직 내 방과 손때 묻은 가구에만 의지하며 산다. 모든 게 유예된 세상에도 책장에 꽂힌 책들만큼은 여전하니까. 그게 그렇게 든든하고 위안이 될 수가 없다. 딱딱한 표지를 만져보고 종이 냄새도 킁킁거리면서 변치 않는 것들의 가치를 생각한다. 그걸 극복이라고 부르면 조금 거창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이만한 여행도 없다. 바야흐로 방구석에서 떠나는 세계여행이라 할만하다. 오늘은 종일 집에서 빌빌거리는 날 위로해준 여행과 같은 책들을 소개한다. 여러 도시로 떠나기에 앞서 우선 옆에 주전부리와 커피를 준비하도록 하자. 거대한 센트럴파크 옆으로 격조 높은 미술관과 고급 쇼핑센터가 즐비한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에 곧 도착할 예정이다.

 

여행지 -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오테사 모시페그 <내 휴식과 이완의 해>(2020)

<내 휴식과 이완의 해>는 도통 찾아보기 어려운 이야기다. 일종의 사회 실험실처럼 잠만 자려는 한 여성을 지켜본다. 부모 유산을 상속받아 말 그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26세 뉴요커 여성이다. 그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어퍼 이스트사이드 고급 맨션에 거주하고, 미술시장의 중심인 뉴욕 상류층 동네에서 큐레이터로 일한다. 가방끈이 길고 며칠을 굶어도 케이트 모스를 닮고야 마는 외모를 지녔으니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며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잔뜩 처방받는다. 그리고 매일 밥보다 많은 알약을 삼키고 침대로 들어간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관계를 단절한 채 칩거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인생이다. 그는 잠시 쉬어갈 뿐이라고 말해. 힘을 내서 다시 일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잠을 좀 청하려는 것뿐이다. 그의 유일한 외출은 식량을 비축할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과 수면 시간을 늘리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는 것뿐이다. 의사는 상담을 받으러 온 그의 말을 다 들어주고 온갖 종류의 신경제를 처방한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나로선 그게 왜 그렇게 힘에 부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약물에 의지해 동면에 가까운 잠을 청해야 한다면 엄청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텐데.

주인공은 쓰레기 같은 남자 놈에게 집착하고, 일터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빌빌거린다. 지적이고 유능하지만 야멸찬 부모와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 사연이 삐죽 대지만, 편의적인 해석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중반 이상까지 읽으니 그가 잠을 청하는 덴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자면서 쉬고 싶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싶다.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읽는 내내 그를 비난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배가 부르니 속 편한 소리나 한다고 비아냥대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생각하는 건 인생이 그렇게 예상처럼 가지런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식으로 흘러가기도 하는 게 삶이다. 일과가 엑셀 시트처럼 착착 정리된다면 소설을 읽을 필요도 없을 거다. 주인공은 훗날 약에 취해 한없이 잤던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까. 정말 휴식과 이완의 해라고 믿었을까. 그녀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이 쓰이지만 다음 일정이 코앞이다. 뉴욕에 버금가는 거대 도시 파리행 티켓이 내 손에 쥐어져 있다. 그곳엔 오래된 연인과 권태에 빠진 내 오랜 친구 폴이 근심에 빠져 있을 것이다.

 

여행지 - 파리 6구 라탱구역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

‘폴’은 서른아홉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한 차례 이혼한 경력이 있고 현재는 ‘로제’라는 오랜 연인과 사귀는 중이다. 폴은 파리 중심가에 살며 풍부한 교양을 쌓아 누구와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요즘 자기보다 한참 어린 ‘시몽’이라는 청년의 구애를 받아 고민에 빠져있다. 평생의 동반자로 믿고 살았던 로제와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흔들리고 있다. 차오르는 권태는 물론이고 늘 밖으로만 돌며 자신에게 어떠한 확신도 주지 못하는 로제를 믿을 수 없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 폴을 통해 남녀관계의 복잡한 속성에 대해 다양한 사유를 풀어 넣는 작품이다. 이제 마흔에 가까워진 폴은 스스로 늙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수많은 연애와 이별을 거쳤지만 남자 하나 선택하는 데 애를 먹는 게 못내 우습다. 오래된 연인 사이는 헐렁해진 지 오래고, 의욕만 넘치는 시몽의 우악스러운 낭만도 버겁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자 운동하는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꼬.

제법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로제는 여자 친구 폴을 다른 여자와 여행을 떠난다. 느닷없이 나타난 시몽은 하던 일까지 다 때려치우고 폴 앞을 서성인다. 사랑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오류의 결정이다. 폴이 두 남자를 두고 저울질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비틀스의 명곡 ‘엘리노어 릭비’에 “세상의 모든 외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거야”라는 가사가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사랑을 갈구하는 세 남녀가 전부 외로움에 시달리다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열띤 섹스를 하고 로맨틱한 말을 건네도 그 말에 진심을 담지 못한다. 과잉된 감정과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만 치렁치렁하다. 이쯤 되면 프랑수아즈 사강이 생전에 했다는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농담하세요. 사랑은 2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3년이라고 해두죠.”

늙은 남자 로제라는 캐릭터는 흥미로운 구석이 다분하다. 로제는 폴을 영혼의 짝으로 느끼지만, 자신과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젊고 천박한 여성에게 관능을 느낀다. 그는 욕정으로 말미암은 관계를 짧게 취하고 다시 폴에게 돌아가길 반복한다. 관계를 망치는 걸 알면서도 외로운 폴을 방관한다. 그는 오래된 관계가 주는 안정은 취하면서도, 열정이 식어버린 폴과 잠자리는 거부한다. 권태와 맞부딪혀 이겨내려는 의지도 없고, 오히려 대용할 수 있는 가벼운 관계에 탐닉한다.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여성과 관계를 갖고 말도 섞기 싫어서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다. 로제는 시몽과 폴이 함께한다는 사실에 화가 치솟지만 그렇다고 자기 모멸을 피할 순 없다. 사실 그는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애송이가 아닐까. 그건 마치 콘돔, 담뱃값, 속옷 등을 인위적으로 어질러 놓은 '트레이시 에민'의 침대 작품처럼 삶을 방치하는 태도에 가깝다. 어디로든 흘러가겠거니 하며 두 발자국 정도 뒤에 선 방조자의 시선이다.

폴이 다시 로제를 찾아가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도돌이표를 마주한다. 폴은 젊은 남자에게 자신의 늙음을 고백하고 익숙한 놈팡이 로제 곁에 선다. 마음 같아서는 젊고 유능한 남자 곁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지만, 그와의 나이 차를 수군덕거리는 주위 눈총을 견디지 못한다. 가엽고 어리석은 폴을 보는 로제의 마음도 복잡하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며 이제 더 쉽고 간편해진 외도에 나선다. 사랑의 아귀다툼에서 우위에 선 로제는 다시 같은 짓을 반복하며 살 것이다. 어질러진 침대는 굳이 치울 생각도 않고 베개 옆에 부스러진 감자튀김 조각이나 툭툭 털어내며 몸을 누일 테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유독 사색과 독백 그리고 나지막한 대화가 잦다. 난 자연스럽게 생제르맹 거리의 찬란한 태양과 고풍스러운 카페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지근거리에 앉아 폴의 하소연을 듣는 것처럼, 그의 삶에도 우리 못지않은 어지간한 권태가 있다는 걸 깨닫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세속적이고 화려한 도시 파리에서의 일정도 여기까지다. 스카이스캐너를 뒤지다가 드넓은 공원과 해변이 그리워 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한 어느 섬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여행지 - 하와이 호놀룰루
정세랑, <시선으로부터>(2020)

다단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가족이 한데 모여 그를 추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유교 사회가 남긴 얼룩은 모두 제거하고 각자 가족마다 심시선을 추억할 수 있는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세상은 생전의 심시선을 여성 예술가라는 편의적인 해석으로 대상화했지만, 정세랑 작가는 심시선이 쓴 생전의 기록과 예술가로서 살아왔던 이미지에 살을 붙이고 숨결을 불어넣는다. 소설이 시종일관 밝아서 계속 눈을 마주치기에 버겁지만, 세간의 말처럼 청량하기 그지없어서 부러운 마음으로 가족들의 화목함을 지켜보게 된다. 집에 틀어박혀서 하와이의 풍경을 떠올리는 건 그야말로 피서에 가까웠고, 이야기에 구김살이 없어서 별 고민 없이 그를 추억할 수 있었다. 이곳은 하와이의 그림 같은 바닷가다. 어떤 얘기를 하든 들어줄 용의가 생기는 곳이라는 말이다.

책을 열면 심씨 집안 가계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이름 석 자로 구성된 보통 가족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계 가정에 가까운 여성 중심이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위대한 유산인 가족들은 각자 제 나름의 우주를 품고 있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니 무궁한 가능성이 전모를 드러내고, 곡절을 넘는 궤적이 그려지는 게 눈에 선히 보인다. 문학이 가진 스펙트럼이란 어쩌면 한 인간의 깊고 깊은 속내를 들추는 것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아 보였던 심씨 집안은 그들의 인생에 드리운 여러 지층이 전모를 드러내면서 더는 심시선 하나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여성 공동체가 하나의 의식을 통해 그 위용을 선보이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시선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서사랄 게 없고 뚜렷한 기승전결도 찾기 어렵다. 위기나 반전과 같은 극적 요소도 멀리한다. 현실을 극화하지 않으니 삶과 밀착하다. 스스로 안위만 살피고 눈앞의 문제만 신경 쓰다 통 둘러보지 못했던 타인을 떠올리는 장면이 잦다.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속사정도 사실은 오해에 그치고 말았던 걸 떠올린다. 너무 바빠서 번거로워서 짚어내지 못했던 여진의 감각. 인물들은 관성처럼 흘러가던 시간에 밑줄을 치며 가까스로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사회 이슈를 가감 없이 소재로 끌어들이고, 한 번쯤 뉴스에서 들어봤을 법한 화자를 통해 사회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꼬인 인물이 없어 다소 계몽적으로 느껴지나 그래서 속이 편안하고 뒷맛이 개운한 작품이다. 긴 여행을 마치기에 이만한 장소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