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삼각관계로 이뤄진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쟁취하기 위한 삼각 구도는 필연적으로 버려진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환희에 가려 신음하는 자를 볼 때 지난 아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건 꼭짓점이 하나 더 찍힌 사각관계를 다룬 이야기다. 관계의 여러 측면을 관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별이 종결 부호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시작의 기점이 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것이 비단 사랑이나 연애 감정이 아니더라도 직선과 대각선으로 그어진 갈림길이 예측 불가능한 역동성을 가진다. 경쟁 구도에 머물지 않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기에 여러 가능성을 가미한다. 오늘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각관계의 매혹을 잘 보여주는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클로저>(2004)

<클로저>의 배경은 복닥거리는 런던이다. 부고 기자 ‘댄’을 중심으로 느닷없이 교통사고를 당한 스트리퍼 ‘앨리스’, 댄의 첫 책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작가 ‘안나’, 댄의 꼬임에 빠져 음란한 여자를 만나러 수족관에 나타난 의사 ‘래리’가 등장인물이다. 클로저를 사랑하는 대다수가 그렇듯, 나 역시 첫 장면을 기억한다. “앤 소 잇 이즈”로 시작하는 ‘The Blower's Daughter’의 구슬픈 멜로디가 화면을 진공상태로 만들고, 인파가 그득한 런던 센트럴 EC1 거리가 보인다. 여백을 걷는 두 남녀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극을 흡수한다.

툭 건드리면 금세 어긋나 버리는 네 남녀의 사랑은 참을 수 없이 번잡하다. 처음 본 여자가 제일 예쁘다는 진화심리학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화 속 연인들은 참 쉽게 반하고 어이없이 헤어진다.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삶에서 비극적인 순간은 사랑을 잃는 일뿐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까지 포함된다고 한다.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기를 쓰던 순간은 금세 잊히고, 지독한 권태가 목덜미를 움켜쥔다. 이별하지 못해 질질 끄는 너저분한 이들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제 앞에 나타난 가냘픈 어깨에 못 할 말을 얹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늦은 밤 외로움에 시달리다 보면 낯선 유혹에 빠져든다. 주위 수많은 이별의 잔해를 보면서도, 또다시 모르는 사람 앞에 서기를 주저앉는다.

<클로저>에서 인상적인 건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도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더 현현한다는 것이다. 그를 집에서 쫓아내고 어두운 방과 작업실, 스탠드 하나 켜진 책상에 앉아 골몰한다.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자신을 침범하는 것 같아 밀쳐내고, 적정한 거리를 지키지 못하면 어김없이 달아난다. 우린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낯선 사람은 아닐까. 이제 다 안다고 익숙해졌다고 착각하지만, 개인의 내밀한 속내엔 항상 빗금이 처져있다. 자기 전 노트에 적은 문장엔 입자가 성긴 어둠이 빽빽하다. <클로저>는 러닝타임 내내 등장인물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고립시킨다. 들끓는 욕망이 폐쇄된 공간에 사그라지고, 울분에 찬 말도 어느새 힘을 잃고 고꾸라진다. 이제 다시 나를 모르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승우 작가는 자신의 첫 연애소설인 <사랑의 생애>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끌린다. 아는 사람은 편하지만 매혹의 대상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편하지 않지만, 때때로 매혹의 대상이 된다. 아는 사람이 매혹의 대상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모르는 사람으로서의 변신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매혹당하기 위해서는 전에 알던 사람을 모르는 사람으로 바꾸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미 아는 상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연인은 내가 의식적으로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끝내 깨우치지 못한 채 사랑의 생애를 마감한다. <클로저>에서 사진작가 안나는 말한다. "모두가 거짓말이에요. 사진은 슬픈 순간을 너무 아름답게 찍죠. 그 안의 사람들은 너무 슬프고 괴로운데도. 그리고 예술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감동을 하겠죠."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결국 이 작품은 '앨리스'의 몫이라는 걸 깨닫는다. 침대에 내쳐져선 무구한 얼굴로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울부짖는 장면이 떠나질 않았다. 첫눈에 반하는 성적인 끌림은 사랑일까? 누가 보기에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연애를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겉보기엔 다 비슷해 보여도, 관계는 다 제각각이다. 실정법 위반이 아니라면 용납할 수 없는 사랑이란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이해는 말로 만든 것에 불과하고 결국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관계에 머물기 마련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도 스쳐 간 그들에게 낯부끄럽게도 문란하고 기괴한 짓을 일삼았다. 한땐 나 빼고 다 지질해 보였는데 거울 앞에 서니 나도 그다지 늠름하지 못하다.

몇 해 전 필립 로스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쓴 문장을 떠올렸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난 이 문장을 읽고 아주 조금이나마 생을 이해하게 됐다. 거장의 말이니 우선 믿고 본다. 우린 서로에 닿지 못할 것이고, 그 닿지 못함이 자아내는 간절함과 불안이 모든 관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영화는 네 남녀가 서로를 영원히 모르는 상태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탈출구가 없는 폐쇄회로에 몰아넣고는 끝을 맺는다.

지금은 타계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네 명의 남녀가 인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들에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시 판 투테>의 중창곡을 튼다. 자신과 상대방의 불륜이나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고통받는 그들을 앞에 두고 웅장한 모차르트의 곡은 사뭇 우습게 들리기도 한다. 이 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역사를 뚫고 살아남은 연주곡이 한낱 이별에 죽일 듯이 달려드는 그들을 비웃는 것 같다.

 

<마지막 4중주>(2012)

예술가의 삶이 그들의 창작물보다 재밌을 때가 있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흥미를 돋우는 일화, 아니면 도통 이해가 불가능한 사생활이 더 흥미롭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면벽참선할 것 같은 타입이 있는 반면에, 트럼페터 쳇 베이커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처럼 마약과 술에 의지해서 곡절 많은 삶을 살기도 한다. 이름을 남긴 대부분 예술가는 성취를 위해 자신을 몰아세우고, 관계를 왜곡시키면서까지 타인에 손해를 입힌다. 이런 뒷얘기는 예술이 지닌 복잡성과 신비로움을 여는 키워드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결성된 지 25주년이 된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 ‘푸가’ 멤버의 이야기다. 그룹 리더이자 그들을 가르쳤던 대부 ‘피터’(첼리스트, 크리스토퍼 워컨)가 파킨슨병으로 더는 연주할 수 없게 되자, 팀원 간 묵었던 갈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 감춰졌던 그들의 인간적인 갈등은 무척 흥미롭다. 4명의 관계도 안에 시기, 질투, 연민, 동정, 분노, 증오가 만연해 오간다. 팀에서 제1 바이올린을 맡은 ‘다니엘’(마크 이바니어), 그리고 부부인 제2 바이올린 ‘로버트’(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와 비올리스트 ‘줄리엣’(캐서린 키너)은 연이어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에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다가오는 공연 날짜를 기다린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는 그들은 시한폭탄과 같은 위태로운 감정을 넘나드느라 연주를 등한시하고 시기 질투에 신음한다. 어쩌면 이들은 리더의 질병과 같이 팀에 변화를 주고, 갈등을 꺼내 들 사건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늘 해오던 소리를 유지하는 게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른다. 예술에 있어 변화 없는 지속이라는 게 얼마나 권태롭고 정체된 기분인지 그들은 증명이라도 하듯 엇나간다. 25년간 최상의 케미스트리를 지켜왔던 이들이 리더의 와병을 빌미로 낯선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친구의 딸과 잠을 잔다. 남편에게 막말하며 걸레 보듯 대하고, 열등감이 사무쳐 너를 증오하겠노라고 공표한다. 삶의 진통이 절절하게 스크린 밖으로 전달돼온다.

그룹 푸가는 해체되는 걸까? 장시간 연주에 어렵기로 소문난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그들의 손길로 더는 들을 수 없는 걸까? 영화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뭐가 됐든 예술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마음을 먹었을까? 영화는 노년에 관해, 나이 차가 나는 연인, 예술적 라이벌, 경력 단절, 부부간의 권태감, 예술이 지닌 영속성과 그 이면에 관한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다룬다. 지루할 새 없이 얘기가 오가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그 혼란상 중에도 연주를 이어가려는 예술가들의 고민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데도 그들은 연주를 위해 흘러넘치는 갈등을 억누르고 무대에 선다.

난 영화 속 푸가 팀이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 4중주를 들으며 여전히 갈등은 봉합되지 않음을 상기했다. 그저 연주는 삶을 잠시 지연시키는 도피의 선율이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의하면 특정 ‘예술’에 대한 선호는 대체로 학력 자본과 출신 성분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음악’적 취향만큼 한 사람의 계급을 분명하게 확정해주고 분류해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정신의 깊이를 가늠하는 가장 고도의 예술이 바로 음악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장엄한 연주로 시작하여, 다시 또 다른 무대로 끝이 난다. 우리는 극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역사가 전해 온 예술을 느끼려 한다. 그리고 러닝타임을 지나 연주자들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다시 무대를 감상한다. 좀 더 나아졌는가. 예술은 더 농익은 모습을 드러냈을까. 예술은 아주 잠시나마 고된 삶을 잊게 하고, 전에 없던 정신을 고양한 걸까.

니체는 고통이란 창조에 수반되는 과정이고, 기껏 이룬 완전한 예술도 새로운 창조를 위해 파괴된다고 했다. 낯설고 가혹한 문제에 직면해 살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할 수 있게 한다고 단언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며 예술을 위해 장렬히 산화할 수 있다. 예술을 지속한다는 건 곧 삶을 향한 의지이고, 이를 디오니소스적이라 칭했다. 남기고 싶은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자주 오지도 않는다. 와도 잘 모르고 지나쳐 버리기에 십상이라 웃을 일이 생길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살다 보니 잊지 못할 일은 드물어 그때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뭔가를 남긴다. 마치 그 순간이 더는 안 올까 봐 불안한 듯 시간을 붙잡아 가둬야 직성이 풀린다. 그럴 때 예술은 죽음에 항거할 수 있는 불멸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다 소멸하고, 비루한 삶이 사그라져도 내가 써낸 예술은 어디선가 명맥을 잇고 있으리라 믿는다. 지나간 연인과 찍은 사진처럼 그 추억만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액자에 남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런 믿음은 누군가를 쓰게 하고, 오랜 고전을 눈을 비비며 읽게 한다. 어떤 이는 순간을 포착해 그림으로 남긴다. 영화에서 삶이 밑바닥을 드러내도 그들이 악기를 들고 영원불멸의 곡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술이 지닌 지속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뭐가 됐든 예술은 결국 이름을 남긴다.

나는 가끔 영화를 보며 삶의 참담함을 확인한다. 이야기가 지닌 어두운 톤에서 비극적인 가련함을 찾는다. 잘 표현된 슬픔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내가 몰랐던 비극이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위로를 건넨다. 내 생과 멀지 않다고 느낄 땐 폭 빠져서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에 취한다. 그렇게 시네마틱한 순간은 내게 수단으로써 삶에 기능한다. 예술이 일상을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마지막 4중주>는 네 명의 삶이 예술에 스며든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수작 영화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