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이 의미심장한 문장을 일러스트레이터 버지니아 모리는 먹빛 그림으로 풀어낸다. 기이하고 뒤틀린 것, 정확히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을 통해서.

Virginia Mori ©, 이미지 출처 – ‘Virginia Mori’
이미지 출처 – ‘Collater.al’
Virginia Mori ©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감각, 기이함과 으스스함. 쌍둥이처럼 등을 맞댄 그것에 대해 영국 작가 마크 피셔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자가 너무나 이상해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장소에 무언가 존재할 때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Virginia Mori ©
Virginia Mori ©, 이미지 출처 – ‘Ratata Festival’
버지니아 모리의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한 구찌 화보, Virginia Mori ©

미지의 존재가 자아내는 이 기묘한 감각은 이탈리아 일러스트레이터 버지니아 모리(Virginia Mori)의 세계에 흘러넘친다. 팔다리가 돋아난 의자, 멍한 얼굴이 다닥다닥 박힌 망토. 이곳에 현실의 언어로 고쳐 쓴 이야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밤 악몽 같은 흔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Virginia Mori ©, 이미지 출처 – ‘Bored Panda’
Virginia Mori ©, 이미지 출처 – ‘Culturenlifestyle’
버지니아 모리의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한 구찌 화보, Virginia Mori ©, 이미지 출처 – ‘Nuts Computer Graphics’

들여다볼수록 헷갈리는 이곳은 수수께끼를 닮았다. 저 멀리 선 그림자가 내가 키우는 개인지 나를 물어뜯을 늑대인지 알 길 없는 어스름처럼. 하지만 어둠이 깔리면 어느 순간 가로등이 켜지듯, 앞뒤가 뭉텅뭉텅 잘린 수수께끼를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기괴한 풍경의 끝은 저 멀리 밀어 두었던 나의 심연이라는 걸.

 

Virginia Mori ©, 이미지 출처 – ‘Bored Panda’
Virginia Mori ©
Virginia Mori ©

끝없이 가라앉을 듯 깊고 어두운 심연. 그곳은 단조 변주곡처럼 뒤틀린 내가 웅크린 밤이다. 도사견처럼 사납게 몸부림치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화살을 날리는, 마주하는 대신 껍질 속으로 도망치는, 바란 적 없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없던 수많은 나. 어쩌면 모리의 세계를 그토록 기묘하게 만든 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살핀 적 없는 것들은 별안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라나니까.

Virginia Mori ©
버지니아 모리의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한 구찌 화보, Virginia Mori ©, 이미지 출처 – ‘Behance’
Virginia Mori ©
Virginia Mori ©

모두가 본능적으로 안다.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기란 절대 쉽지 않다는 걸. 하지만 언제까지 외면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푹 젖어 있던 침대를 보송보송 말리고 덥수룩하게 자란 잡초를 말끔히 다듬고서야 제 색을 되찾은 그림을 보며 나를 돌이켜본다. 어쩌면 심연은 이미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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