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반환점을 돌았지만 일상은 미동도 없다. 알람을 끄는 다급한 손, 역전 커피집, 회사 앞 가로수가 마치 짜인 각본처럼 반복된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바삐 울리는 전화를 받고 쉴 틈 없이 회의를 들락거리다 보면 퇴근이 코앞이다. 우린 하루 대부분을 일터에 머물면서도 누군가가 정해놓은 대로 이끌린다. 늦은 밤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미세한 파열을 느끼지만, 언제나 그랬듯 소용없는 아침을 맞는다. 이런 연유인지 연초엔 자기계발서가 잘 팔린다. 성공한 이의 잔소리를 들으며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시간을 다잡는다. 입바른 말만 하는 저자가 밉살스러워도 밑줄을 쳐가며 날 점검한다. 의자를 곧추세우고 무심하게 읽던 서류를 괜스레 꼼꼼히 살펴본다. 아직 하반기가 남아 있으니 뭔가 바꿀 수 있으리라. 자기 계발서의 꼬장꼬장한 말투가 질색이라면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에 관한 영화는 어떨까. 오늘 소개할 작품은 투철한 직업윤리를 다룬 영화들로 꼽았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2009년 뉴욕, 추운 겨울날 허드슨강에 여객기가 불시착한다. 기체가 새 떼와 충돌한 탓에 엔진이 다 타버렸다. 추락 직전 관제탑은 회항을 명령하지만 노련한 기장 '설리'(톰 행크스)는 회항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어긴다. 그는 뉴욕 한복판으로 조종간을 틀어 가까스로 승객들을 무사히 구해낸다. 승무원들의 침착한 대처와 해양구조대의 즉각적인 조치가 맞물린 결과다. 하지만 미정부는 이를 사고로 규정한다. 미 교통안전위원회는 조종사를 비롯한 비행 과정 전체를 치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기적을 믿기 보다는 예측하지 못한 요행을 만들어낸 시스템을 점검하는데 열을 올린다. 오히려 기장 설리가 규칙을 이탈해 생긴 위험도가 더 크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으며 그를 옥죈다. 한 개인의 영웅적 행위에 도취하기보다는 과정 전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의심해본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16년 말에 개봉한 작품이다. 여전히 대참사의 여파에 시달리던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난 미국 사회하면 총기 소지와 부패한 물질주의를 떠올린다. 탐욕스럽고 제멋대로인 합중국은 고고한 유럽 연합과 달리 천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설리>를 보고 나면 미국이 인류에 이바지한 바가 뭔지 그 실체를 볼 수 있다. 미국 수정 헌법 제1조는 자유를 향한 예찬이다. “우리 합중국 인민은 더 완벽한 연방을 형성하기 위하여, 정의를 수립하고, 국내의 평안을 보장하고, 공동방위를 제공하고, 일반적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와 후손들의 자유에 대한 축복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을 제정한다.” 그들은 이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체제를 구축했다. 미국은 할리우드식 영웅주의가 판치는 나라지만, 그 이면에 기적과 온정을 믿지 않는 냉철한 시스템도 있음을 상기한다. 영화를 보면 그들의 주도면밀함이 명백히 잘나 보여 눈꼴시지만, 무엇이 강대국을 지탱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사건을 조사하는 동시에 각자 직업에 면밀한 개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의 빈틈을 메우는지에 집중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을 나가고, 규칙을 지키며 일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 지닌 가치를 적어나간다. 어쩌면 영웅이란 우리가 매일 견뎌내는 평범한 일상 그 자체가 아닐까.

 

<스포트라이트>

2002년 보스턴, 지역 성직자 다수가 30여 년간 수많은 아동을 성추행한 혐의에 몰린다. 하지만 지역을 장악한 가톨릭 교구는 쉽사리 사건을 무마한다. 지역 신문인 보스턴 글로브는 새로운 편집장을 기점으로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취재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지역사회 카르텔이 한 언론사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차분하게 훑는다.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언론사의 모험담은 요즘처럼 언론을 불신하는 상황에선 그 자체로 신화에 가깝다. '기레기'라는 말이 횡횡하고 거짓과 선동을 일삼는 보도가 대중을 오도한다. 팩트 체크 없이는 기사 한 줄 믿기 어렵다는 말이 더는 농담이 아니게 됐다. <스포트라이트>는 언론 윤리를 다루는 영화답게 발품팔이를 불사하는 보도과정을 세밀하게 다루고, 진실의 퍼즐이 맞춰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짚어나간다.

편집장은 신부 한 사람을 고발하는 대신 교회라는 거대한 성을 겨냥하고, 일선 기자가 보도를 밀어붙여도 보도 팀장은 시스템 전체를 잡으라고 타박한다. 저널리즘이 사회 문제를 공공의 논의에 회부하는 과정이 선연하다. <스포트라이트>를 향한 전 세계의 열광과 지지는 그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언론을 불신하는 풍조에 시달렸는지 실감할 수 있는 신호다. <설리>가 미국식 영웅주의를 재차 반추한다면 <스포트라이트>는 미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토대가 어디에서 오는지 살핀다. 영화는 스타일이 평이하고 이야기의 낙차가 없다시피 해서 어느 곳 하나 튀지 않는다. 이 영화의 배역진이 얼마나 화려한지 살펴보면 그 흔한 러브라인 하나 없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대신 직무와 맞물려가는 조직을 보는 쾌감이 있다. 개개인의 선의로 발화된 스펙터클이 아닌, ‘저널리즘’ 그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그려낸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베테랑 기자 '칼'(러셀 크로)은 유력 정치인이자 친구인 '스티브'(벤 애플렉)의 부탁으로 살인사건을 조사한다. 정치인이 개입한 사건이라는 게 늘 그렇듯 구린내가 풀풀 나는 음모를 직감한 칼은 이 사건을 추적하기로 한다. 칼은 고된 취재 과정에서 신입 기자 '델라'(레이철 맥아담스)와 호흡을 맞춘다. 처음 두 사람은 취재 방식이 상이해 사사건건 대립한다. 델라는 직접 발로 뛰어 사실을 확증하고 상대의 눈을 보고 들은 내용만을 중시하는 칼을 노땅 취급한다. 칼은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델라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무시한다. 하지만 점점 미궁에 빠지자 두 사람은 환상의 복식조가 되어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한다. 이처럼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신구 매체가 갈등 끝에 맞물리는 에피소드를 통해 요즘 언론사가 지닌 딜레마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백미는 언론인으로서 사명감이 대단한 칼이라는 캐릭터에 있다. 그는 독선적이고 괴팍해서 무리수를 남발하지만 못지않은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요동치는 진실의 끝자락을 붙잡으려 몸으로 부딪친다. 관계자와 만나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진다.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가 아니라, 검증 없이는 글로 남기지 않는다. SNS에 실시간으로 온갖 가벼운 말들이 쏟아지는 시대에 글의 무게를 의식하는 프로의식이 돋보인다. 특히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칼이 감정을 삭이고 여러 번 고쳐 쓰는 빼곡한 노트와 남루한 코트에서 꺼내는 만년필의 날렵한 움직임은 이제는 보기 힘든 스테레오 타입이라 퍽 정겹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정치 스릴러답게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수두룩하지만, 정작 영화의 최대 스펙터클은 전혀 무관한 곳에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며 새벽녘 신문이 인쇄되고 포장되어 트럭에 실린 채 신문사를 떠나는 순간이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