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떼가 창궐하고, 괴생물체가 침공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나도는 가운데 주인공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아포칼립스 콘텐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이 위기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내기 위한 여정에 뛰어드는 주인공은 거의 늘 처자식이 딸린 남자라는 점. 가장이 온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레퍼토리의 무수한 변주를 지켜보며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종말의 순간, 도대체 여성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멋진 답이 되어줄 두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세상이 끝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존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1. 최진영 장편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고, 부모님마저 죽은 상황. 주인공 ‘도리’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동생 ‘미소’를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간고사와 토익 점수, 불안한 미래를 걱정했던 평범한 대학생 도리는 그러나 누구보다 빠르게 재난 상황에 적응한다. “어린아이 간을 먹으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유언비어가 나도는 지옥에서 미소를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도리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도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달리고 달린 끝에 러시아 울란우데까지 가닿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지나’와 그 가족 무리를 만난다.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사랑은 시작된다.

이 소설의 힘은 전형적인 상황 속에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살아 숨 쉰다는 데 있다. 재난 상황에서 20대 여성은 흔히 구조를 기다리는 수동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도리는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다. 직접 뛰쳐나가며,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만큼 상황을 돌파하는 힘을 가진 인물이다. 이런 도리와 한 쌍을 이루는 지나 역시 매력적이다. 지나는 재앙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세계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여전히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망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려 하는 모습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만든다. 자신만의 강인함을 품고 있는 이 두 사람의 여정을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르게 된다. 잘 만든 아포칼립스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

두 인물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먼저, 지나의 무리에 도리가 합류하는 장면. 지나의 아버지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 탑차에 온 일가친척들을 태우고 한국을 떠나온 사람으로, 이 집단의 리더다. 도리는 그런 그의 앞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 그가 믿을 수 있을 때 돌려주겠다며 자신의 잭나이프를 돌려주지 않자, 도리는 말한다. 그럴 필요 없다고, 지금 돌려 달라고.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그에게 쐐기를 박는다. “믿지 않아도 된단 말이에요. 나도 그럴 테니까.”

도리가 경계심이 강하고 독립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반면, 지나에게는 또 다른 단단함이 있다. 그 어떤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는 힘이다.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p.55)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그래서 이 둘은 마침내 목적지에 닿게 되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길.

 

 

2. 넷플릭스 영화 <버드박스>

<버드 박스>는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일주일 만에 4500만 건의 조회 수를 자랑하며, 위험천만한 ‘버드 박스 챌린지’ 열풍까지 불러일으켰던 영화다. 산드라 블록이 열연한 주인공 ‘맬러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다른 재난영화보다 훨씬 가혹하다.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이상하게 세뇌되어 결국 자살하는 괴현상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탓이다. 더군다나 맬러리에겐 지켜야 하는 아이가 둘이나 있다. 눈가리개로 시각을 차단한 채, 두 아이를 데리고 피난처로 향하는 맬러리의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다.

영화 버드 박스 예고편

검은 강물 위쪽으로 한 남성의 무전이 흐른다. “강으로 오는 게 제일 빠르지만, 아이들이 있으면 강은 어려울 거예요.” 그러나 맬러리는 강을 따라 내려가기로 결단하고, 이내 세 사람은 눈을 가린 채 배 위에 오른다. 5년 전, 괴현상이 시작될 때 임신부였던 맬러리는 재앙 속에서 무사히 아이를 낳았고, 다른 임신부의 아이도 거뒀다. 그리고 5년의 시간 동안 이 둘을 가르치며, 끝끝내 함께 살아남는다.

<버드 박스>의 맬러리를 보며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부산행>의 임신부 ‘성경’(정유미)이 떠올랐다. 성경은 계속해서 남편 ‘상화’(마동석)와 ‘석우’(공유), 노숙자(최귀화) 등 남성들의 보호를 받다가, 끝내 그들의 희생으로 살아남는 인물이다. 성경으로 인해 주요 인물들이 자꾸만 위험에 빠지기 때문에 소위 ‘민폐 캐릭터’로 여겨졌다. 반면 맬러리는 임시 피난처에 식량이 떨어지자, 외부의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가져오는 데 기꺼이 동행한다. 보호만을 바라지 않으며, 한 사람의 몫을 다하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성경과 맬러리, 두 사람이 맞는 결말은 비슷한 듯 다르다.

“우리 딸 이름, 서연이야!” 남편 상화가 자신의 목숨을 좀비들에게 내주면서 외친 한마디에 성경은 흐느낄 뿐이었다. 부성애를 빛낸 가장들의 죽음을 딛고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가는 성경의 걸음은 어쩐지 힘이 없다. 이와 달리 자신의 힘으로 은신처에 도달하는데 성공한 맬러리는 마침내 이름도 없이 ‘걸’, ‘보이’로 불렀던 아이들에게 직접 이름을 붙여준다. 자신이 기억하는 두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렇듯 두 영화가 재난 속 약자인 임신부와 아이를 살아남게 하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기억하고 싶은 대사

“Nobody is looking!”

배가 뒤집히는 일 없이 무사히 급류를 통과하려면 반드시 한 명은 눈을 뜨고 길 안내를 해야하는 상황. 눈가리개를 벗는다는 말은 곧 죽음과 같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타인의 딸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없었던 맬러리는 누구도 눈을 뜨지 않은 채 급류를 정면돌파하기로 마음먹는다. 약자이자 타인인 인물을 희생시키지도, 자기 자신을 쉽게 희생하지도 않는, 용기있는 결단이었다.

 

 

3. 박서련 단편소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소설집 <서로의 나라에서> 수록작품)

마지막 작품의 화자는 다행히도(?) 혼자다. ‘나’는 누구를 지키는 대신 찾는 인물이다. 수많은 사람이 감염되어 미쳐 날뛰자 화자는 전남편이 있는 연천으로 향한다. 홀로, 캠핑카를 몰고서. 부득이 차에서 내릴 상황에 부닥치면 손도끼로 스스로를 지키며. 거침없이 질주하는 화자의 모습은 <매드 맥스>의 ‘퓨리오사’를 떠오르게 한다. 이야기가 재밌어지는 것은 화자가 한 소년을 만나 동행하게 되면서부터다. 이 조합이 무척 신선하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과 덜 자란 소년. 중년 남성이 어린 여성을 구해주는 닳고 닳은 이미지 대신 생존에 필수적인 운전 능력을 갖춘 성인 여성이 겁에 질린 소년과의 동행을 택하는 장면을 볼 때, 우리는 왜 이제껏 이런 장면을 보지 못했나 탄식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고 시동을 껐다. 남자애는 내 눈치를 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손도끼를 든 내가 먼저 내렸고 남자애는 차 뒤편으로 돌아와 내게 바싹 붙었다. (…) 이 애에게 운전을 다 가르치기 전까지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아주 천천히 죽을 수 있을까 _<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중

종말이 가깝다고 느껴질 만큼의 심각한 재난 상황에서 진정 무서운 것은 재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다. 여성의 몸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약탈뿐만아니라 강간의 위험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를 돕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의, 사랑의 힘이다. 다가온 종말에 무릎 꿇는 대신 전진하길 택한 세 여성과 함께 그 힘을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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