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1일은 이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면서 드디어 낙태는 헌법에 있어 처벌을 받지 않는 일이 되었다. 여성이 자신의 몸의 자기결정권을 되찾게 된 것은 66년만의 일이다. 어떻게 얻은 자유인가? 많은 여성들의 절실한 참여가 없었다면 이런 판결이 있기가 더욱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이제 비약이 아닌 현실이다. 정말로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현재, 앞으로의 미래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탈연애 선언 페이스북

그 많은 목소리 중 <탈연애 선언>이라는 퍼포먼스는 특히 눈에 띈다. <탈연애 선언>이란 4월 8일 있었던 세계여성의 날에 발표된 메시지이자 퍼포먼스이다.

 

1. ‘탈연애’를 외치다

<탈연애 선언> 공동대표 도우리의 ‘이런 경향’ 인터뷰

<탈연애 선언>은 칼럼니스트 도우리와 디자이너 수리 그리고 공덕동하우스 대표 HyeEunHong이 모여 만든 프로젝트팀이며, 이들이 여성의 날을 맞아 선언한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그중 가장 핵심을 가로지르는 이야기는 ‘정상 연애’에 우리의 연애가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하나.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고 여기며, 연애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관계적 독점을 거부한다.
하나. 우리는 다종다양한 인간을 ‘남자’와 ‘여자’ 역할에 가두는 성별 역할극에 반대하고, 이를 강제로 수행하게 하는 이성애중심주의에 반대한다.
하나. 우리는 젊을 때 연애하지 않거나, 나이 들어 연애하는 인간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모두를 연애에 대한 강박에 빠지게 하는 정상 연애 중심주의에 반대한다.
하나. 우리는 연애 밖 섹슈얼리티 실천자들, 비독점적 연애 관계, 무성애, 비연애, 성소수자, 성판매 여성 등에 대한 혐오에 반대한다.

- <탈연애 선언> 중에서

 

2. 그렇다면 ‘정상 연애’란 뭘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단순히 ‘연애를 하지 말자’라는 애먼 소리가 아니다. 그들은 세상이 만든 ‘정상 연애’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가장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탈연애 선언 페이스북 

그렇다면 ‘정상 연애’란 무엇인가? ‘모두의 축복 속에 빛나는 이성애자 남녀가 손을 잡고 국가가 지정해준 형식에 맞는 방법으로 안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일’ 정도로 예를 들 수 있을까? 이 역시 모호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어렴풋이 알아챌 거라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이상해보이지 않는 방식의 연애. 특이하다거나, 남들과 다르면 손가락질받는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는 연애. 거칠고 과하게 표현하자면 거대한 전제군주제가 용납한 방식의 연애를 말한다.

 

3. 미디어가 만든 ‘정상 연애’

그들이 말하는 ‘정상 연애’를 반드시 연애 방식으로 일축할 순 없을 것이다. 크게 보자면 여성들의 자유의지, 여성들의 자유행동과 더 큰 관련이 있다. 여성은 왜 반드시 연애 관계에서 정해진 ‘여성 역할’을 해야 하는가? 프로이트나 들뢰즈 같은 학자들이 말하길 ‘욕망’이란 것은 자고로 형태가 없다고 한다. 욕망을 가진 주체도 그 욕망의 형태와 본질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욕망이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며 또 쉽게 정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우리가 욕망하는 연애 방식은 어떤 형태로든 정해진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도 없다. 우리가 스스로 두드려보고 스스로 알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기에 너무 바쁘다. 또 그 과정은 어렵다. 어떤 것이든 사람은 잘 알지 못하고 낯선 것을 불편해한다. 그 불편함을 빨리 해소해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 선행된 정보를 따라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의지와 행동, 처신과 연애 방법까지 그럴 수도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탈연애 선언> 퍼포먼스 중 일부, 출처 – 도우리 인스타그램 

그렇다고 한들 미디어가 ‘정상 연애’를 만들었다니, 이건 좀 생뚱맞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디어와 문화콘텐츠에서 받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하다. 드라마 속 인기 배우가 바른 립스틱이 나와 어울리든 아니든 백화점에서 동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하나같이 따라 사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런 다수를 따르는 행위, 미디어에 장악되는 현상을 물론 다른 심리학적 용어로 대처해 말하는 게 더 적확하겠지만, 이 예시는 미디어의 영향력을 간략히 설명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단순한 이미지뿐만이 아닌 인간의 행동과 관습들을 우리는 미디어에서 보고 배운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쉽게 ‘정상’의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3-1. 변화가 필요한 아이돌 문화

미디어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상품화 되어 있는 연예계 노동자로, 아이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모든 아이돌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 아이돌이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콘텐츠 퀄리티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아이돌들이 보여주는 자신의 애티튜드, 다시 말해서 여성 아이돌이 보여주는 여성성은 절대적으로 대상화 모델에 갇혀있는 경우가 크다는 것이 문제다. 다른 미디어 속 인물에 비하여 자신의 거의 모든 모습-헤어스타일, 말투, 평소 입는 옷, 사용하는 화장품, 휴대폰 케이스 같은 소유품 등-이 아이돌 상품 가치에 기여하며, 이런 모습을 통해 더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이 아이돌의 모습을 따라 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여성 아이돌은 청순가련형이거나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지만 작고 귀여우며 착하고 선한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 또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크롭티와 짧은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도 격한 안무를 문제없이 소화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미디어 콘텐츠의 세계관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요컨대 이런 모습을 ‘기본적인 여성 아이돌’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엠버, 출처 - 엠버 인스타그램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여성 아이돌, 예를 들어 f(x)의 멤버 ‘엠버’같은 캐릭터에게 우리는 낯선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곧 그런 애티튜드를 미디어는 계속 고치려고 노력한다. 엠버의 경우, 기획사에서는 미디어 속 다른 인물들이 ‘엠버의 여성성’을 자꾸 바꾸려 하고, 문제시 여기고, 심지어 엠버의 ‘여성성’을 의심하는 모든 경우의 모습을 상품화시켜 미디어에 전시한다. 이런 모습들은 여자 아이돌이 보여주어야 하는 역할을 더욱 확고하게 획일화하고, 다양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줄 뿐이다. 최근 화제가 된 (여자)아이들의 멤버 슈화의 사건이 탈아이돌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넌 왜 꾸미지 않니?’라는 질문에 대답한 그의 글을 보자.

저는 물질주의자는 아니지만 삶을 즐기려고 해요
많은 분들이 항상 저한테 왜 너는 화장도 안하고 네일도 안하고 염색도 안해? 라고 물어보시는데
저는 많이 꾸미지는 않지만 외출하기 전에 거울을 보고 머리도 빗고 깔끔하게 단장하고 나가요~ 왜냐하면 이게 편하니까요
모든 사람은 추구하는 게 다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저는 존중합니다
저는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이런 제 모습이 좋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저는 제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이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판단할지 몰라도 저는 항상 당당한 이 모습 그대로 저를 계속 사랑할거에요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명언 두 마디를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당신을 일부러 화나게 만드는 사람에게 절대 화내지 마세요」
「당신만의 장점이 있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입니다」

- (여자)아이들 ‘슈화’의 인스타그램 글 중에서

슈화, 출처 - (여자)아이들 인스타그램 

 

3-2. 클리셰적 러브스토리는 현실에 없다

요즘은 연예인들이 함께 나와서 짝을 짓거나 가상결혼을 하는 연예 프로그램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당연하게 이런 리얼 연예 프로그램 속에서도 여성 연예인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예컨대 첫 데이트에서 여성 연예인은 도시락을 싸가거나, 남성 연예인이 특기라며 팔굽혀 펴기 같은 행위를 보여줄 때, 여성 연예인은 손을 모으고 응원을 하는 모습들이야 언제든지 TV를 틀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실 이런 연애를 하고 있는 여성 역할을 더 잘 볼 수 있는 매체는, 드라마나 영화처럼 서사가 있는 작품이다. 최근 들어선 여성이 연애에만 집착하는 서사에서 벗어나 삶의 주체가 되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 연애 형식이 조금도 ‘정상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채널A <하트시그널> 시즌2 공식 이미지

미디어는 데이트를 준비할 때 메이크업을 하거나, 잠을 잘 때도 풀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 언제나 권력이나 현실 이상과 싸우는 남성 모습 같은 클리셰적인 성별 역할이 자주 비춘다. 그뿐 아니라 미디어는 그들이 만나서 연애하는 모습 역시 ‘정상 연애’ 수순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는 면만을 담아낸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스틸컷

예를 들어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2018)라는 넷플릭스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와 계약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곧 우리는 이 연애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 연애’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에게 접근하는 모든 이성을 질투하고,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가 본심을 전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연애가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처럼 뻔하고 예감대로 이뤄지는 행복한 ‘정상 연애’는 사실 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두 잘 알 것이다.

 

3-3. 미디어 속에서 ‘탈연애’를 보기는 어렵다

<비밀의 숲> 포스터

오히려 연애는 좌충우돌이다. 드라마 <비밀의 숲>(2017), 드라마 <루터>(2010~2019), 드라마 <엑스파일>의 경우 주요 여성캐릭터와 남성캐릭터는 ‘정상 연애’를 하지 않는다. <비밀의 숲>의 ‘황시목’(조승우)과 ‘한여진’(배두나)뿐만 아니라, ‘이창준’(유재명)과 ‘이연재’(윤세아)의 관계도 우리가 아는 ‘정상 연애’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루터>의 ‘존 루터’(이드리스 엘바)와 ‘앨리스 모건’(루스 윌슨), <엑스파일>의 ‘스컬리’와 ‘멀더’의 관계도 그렇다. 그들의 관계를 연애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그들은 서로를 연애 상대라는 일정한 역할에 놓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화학 반응을 ‘사랑이 아니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단지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모호함,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모호한 이끌림’. 그런 것을 ‘정상 연애’에서 벗어난 탈주된 관계의 몇 가지 가능성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미쓰 홍당무> 스틸컷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르다. 필자가 몇 가지 사례로 든 드라마들은 모두 러브스토리가 주가 되는 서사가 아닌 사건‧사고를 다루는 스릴러물들이다. 여기서 캐릭터들은 스피디하게 사건을 해결하고 진지하고 잔혹한 사건들에 몰입해 있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느낄 여유도 없어 드라마는 이들의 감정을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다양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 ‘정상 연애’의 선상에 놓이지 않게 된다. 딱히 탈주된 방식의 연애를 하는 관계를 미디어 안에서 정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드라마 <보디가드>(2018), 영화 <미쓰 홍당무>(2008), 영화 <로마>(2018), 영화 <바그다드 카페>(1987), 영화 <폴라>(2019) 등 수많은 예시를 생각했지만, 이 작품들에서의 관계를 하나로 종합하는 것은 <탈연애 선언>의 메시지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감상한 사람들이라면 작품 속 캐릭터들이 ‘모호하지만 분명한 감정’을 가지고 ‘정상 연애’에 균열이 일어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리라 생각한다.

<폴라> 스틸컷

살아있는 실체는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우리의 존재는 조금씩 삐뚤빼뚤 제멋대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우리는 ‘정상’의 모습에 닿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곤 하는데, 애초에 그 ‘정상’이라는 건 누가 만든 것인가?

 

4. ‘여성’을 붙이지 않는 방식의 예술문화‧미디어‧노동자

현재 예술문화 및 미디어가 좋아하는 여성의 역할은 사실 판에 박혀 있다. 드라마나 영화 등 작품에서의 여성뿐 아니라 뉴스의 아나운서나 기자, 날씨를 전하는 캐스터의 역할도 만들어진 성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하는 내용의 중요도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분배된다. 여성 전달자가 좀 더 중요도 있는 것을 전달하거나 독점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 기자는 전문성보다 외모로 화제되는 경우가 많다. 성역할을 연애와 따로 떼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미디어의 그림자는 곧 사회 전반부의 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가장 사적인 영역인 연애의 역할에게까지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이 연속된 관계를 역행하는 의식도 마찬가지다. 즉 연애 방식과 역할이 사회 의식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미디어의 모습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안경을 끼고 뉴스를 진행하며 생각을 밝힌 임현주 아나운서, 출처 – 임현주 아나운서 인스타그램 

필자는 더 나아가 성별 역할을 나누거나 정할 때는 이 미디어 노동자들 앞에 ‘여성’이란 수식어를 던져버려야 하는 일이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 <성의 정치 성의 권리>(2012)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덧붙인다.

여의사, 여교수, 여공, 여류작가 등 직업군 앞에 여성을 붙이는 습관은 여성이 그 집단의 보편적 형태가 아니라 예외라고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환기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 권김현영, 루인, 김주희, 한채윤, 류진희,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중에서

예능 <방구석 1열>에서 이경미 감독은 “여성 감독이 여성 이야기를 만들 때 이것을 여성 영화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불편하다”며 “똑같이 시장에 나와서 작품성으로 논의되고 싶고 똑같이 배우로서 연기력으로 판단되고 싶을 뿐,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여서 좀 더 이야기되는 것들이 때로는 불편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방구석1열> 방송 이미지

이경미 감독의 말을 듣고, 여성이 여성에서 벗어나고자 맹목적으로 ‘여성’을 강조할 때 오히려 좁은 편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는 보다 여성 인권에 힘을 실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탈연애 선언>은 이러한 성별 자체를 벗어나 모든 인간의 모습이 표준으로 고착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별을 가진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지향하는 사람들, 연애 밖의 관계와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삐져나온 삶 형태를 긍정하며, 국적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모든 가능성을 긍정한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따라왔던 방식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를 뒤흔들고 교란한다고 해서 세상이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정상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정한 자신만의 사랑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애인이 생기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수순, 그리고 그것을 정상이라 생각하고 이것에서 이탈하면 ‘비정상’이라고 일컫거나 또는 ‘아이’ 취급을 하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차줘야 한다.

<탈연애 선언>이 가히 들뢰즈가 니체의 망치를 들고 프로이트를 가격했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더 심화시켰고, 들뢰즈는 이런 인간을 식민지로 삼는 모든 정상성을 깨부수고 탈주하라고 말하였다. 그것이 정말 생동하는 삶이다. <탈연애 선언>을 말하는 그들은 모든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과 투쟁하며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깨닫기 위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욕망에 있어 정해진 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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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나아가기 위해 씁니다. 그러나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