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 최고의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어워즈의 진행과 수상자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래미가 갖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어떤 아티스트가 한 번이라도 수상 후보로 지목되면, 누군가 그 아티스트를 소개할 때마다 ‘그래미에 수상 후보로 지목된’이라는 영광스러운 꼬리표를 꼭 붙여줄 정도다. 그만큼 그래미를 향한 음악가와 대중의 관심은 상당히 높다. 그래미에는 수많은 시상 분야가 존재하는데, 근 몇 년간 흑인 음악 아티스트들이 여러 부문에서 선전하며, 과거 ‘그래미는 래퍼를 비롯한 흑인 음악 아티스트를 차별한다.’는 목소리 또한 잦아드는 추세다. 그렇다면 과연 올해 2월 10일 열릴 그래미에서의 힙합, 알앤비는 어떨까? 이와 관련한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함께 살펴보자.

 

본상에서 힙합&알앤비의 영향력

본상이라고 부르는 레코드 오브 더 이어(Record of the Year), 앨범 오브 더 이어(Album of the Year), 송 오브 더 이어(Song of the Year), 베스트 뉴 아티스트(Best New Artist)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에도 힙합과 알앤비 장르가 여러모로 강세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작년 한 해 동안 흑인음악이 대중성뿐만 아니라 예술적 완성도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느 정도의 지표이기도 하다.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나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 같은 굵직한 아티스트는 차치하더라도, 시저(SZA), H.E.R. 같은 신인 아티스트가 본상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힙합과 알앤비의 미래가 여전히 밝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년, 여러 흑인 음악 아티스트가 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중 세 개의 본상이 팝스타의 면모가 강한 브루노 마스(Bruno Mars)에게 돌아간 것이 아쉬웠던 팬들에게 이번 그래미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상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켄드릭 라마와 드레이크, 힙합 신의 왕

흑인 음악이 강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켄드릭 라마와 드레이크(Drake)의 눈부신 활약상은 주목할 만하다. 켄드릭 라마는 본상을 포함해 모두 여덟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드레이크는 일곱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켄드릭 라마의 경우, 올해 개인 정규앨범을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대세임을 여전히 입증하고 있다. 더 긍정적인 사실은, 자신의 참여로 하여금 자신이 운영하는 레이블 TDE의 아티스트를 함께 빛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OST 앨범 <Black Panther The Album Music From And Inspired By>에서 합을 맞춘 시저와 또 다른 래퍼 제이 락(Jay Rock)이 그들이다. 혼자 독주하기보다, 자신이 믿고 아끼는 아티스트와 함께 이 같은 활약을 하고 있다는 점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드레이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별다른 아티스트와 함께하지 않아도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이 같은 성과를 이뤄냈다. 25곡에 달하는 앨범 <Scorpion>을 발매했고, 몇몇 곡으로는 긍정적인 메시지까지 전달했다. 한편, 작년 한 해 동안 드레이크에게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성과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푸샤 티(Pusha T)와의 피 튀기는 디스전에 이어 숨겨둔 딸을 세상에 당당히 공개한(공개하게 된) 것도 바로 작년의 일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랩 스타가 잠시 장애물에 부딪히는 듯했으나, 드레이크는 이렇게 자신을 증명해냈다. 켄드릭 라마와 드레이크, 이 중 한 명이 아닌 둘이기에 이번 수상 레이스가 더 뜨겁게 느껴진다. 힙합 신의 진정한 왕은 누구일지, 이번 수상이 그 타이틀의 주인을 정할 작지 않은 지표가 될 것이다.

 

엘라 마이와 H.E.R, 알앤비 신의 떠오르는 샛별

이번 그래미 본상 후보에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두 알앤비 싱어의 이름이 자리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엘라 마이(Ella Mai)와 H.E.R.이다. 평생을 활동해도 이름 한 번 올리기 힘든 자리에, 길지 않은 커리어의 두 신인이 자리했다는 사실만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엘라 마이의 경우 미국에서 한차례 엄청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의 대표곡이자, 이번 본상에 이름을 올린 곡 ‘Boo’d Up’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이다. 4x Platinum, 즉 4백만 장이라는 엄청난 판매를 기록하며 알앤비 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엘라 마이는 영국 출신의 아티스트지만, 사실 ‘Boo’d Up’의 성공 전부터 미국 팬들에게는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힙합 신을 대표하는 프로듀서 중 한 명인 머스타드(DJ Mustard)의 레이블에 일찌감치 계약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싱어 켈라니(Kehlani)의 앨범 투어에도 게스트로 참여했기 때문에다. 이처럼, 엘라 마이는 이미 전부터 실력이 검증된 아티스트였다.

H.E.R. 역시 마찬가지다. EP를 제외한 자신의 정규 앨범 한 장만으로 그래미 본상 두 부문 후보라는 쾌거를 이뤄낸 검증된 아티스트다. H.E.R.은 국내에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아티스트인데, 내한 공연을 진행한 적도 있는 다니엘 시저(Daniel Caesar)와 함께한 곡 ‘Best Part’가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됐기 때문이다. H.E.R.은 등장부터 남달랐다. 짙은 선글라스를 써 얼굴을 가리고, 그 어떤 싱어보다 짙은 감성을 내뿜는 모습에 많은 팬은 ‘베테랑 아티스트가 신인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제 막 이십 대 초반의 아티스트란 게 밝혀졌고, 팬들은 더욱 열광했다. 그 신비주의가 이제는 점점 옅어져 정체성이 희미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캐릭터가 어떻든 이제 팬들이 기대하는 건 그의 외모가 아닌 음악이다. 이처럼, 엘라 마이와 H.E.R.은 알앤비 신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번 시상식에서 두 신성 중 누가 더 밝게 빛날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닙시 허슬과 제이 락, 갱스터 래퍼의 그래미 어워즈

개인적으로 이번 그래미의 베스트 랩 앨범(Best Rap Album) 부문의 가장 놀랄 만한 수상 후보는 닙시 허슬(Nipsey Hussle)의 <Victory Lap>이라고 생각한다. 닙시 허슬은 서부 갱스터 랩의 바통을 이어가고 있는 갱스터 래퍼다. 대중성보다는 갱스터로서의 진정성과 거친 거리의 모습을 담아내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그래미의 성격상 이처럼 갱스터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그것도 짙게 내비치는 아티스트를 후보로 선정할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닙시 허슬의 앨범이 예술적으로도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제 그래미의 후보 선정에도 보이지 않게 존재하던 벽이 많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수상에 관해서는, 사실 <Victory Lap>이 상을 거머쥐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카디 비(Cardi B), 푸샤 티(Pusha T) 같은 쟁쟁한 후보가 옆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성과를 통해, 수상 여부를 떠나 닙시 허슬의, 그리고 갱스터 랩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상을 포함한 여러 부문에 이름을 올린 제이 락 역시 갱스터 래퍼다. 켄드릭 라마의 레이블 TDE 소속으로, 제이 락 역시 상업성보다는 진정성 있는 음악에 중점을 두는 래퍼다. 하지만 이번에 후보로 선정된 곡들은 대체로 상업성이 묻어나온 곡들이다. 켄드릭 라마, 퓨처(Future)와 함께 한 ‘King’s Dead’가 그렇고, 다시 켄드릭 라마와 함께 한 ‘WIN’이 그렇다. 사실, 제이 락 개인에게 이번 음악적 성과는 더 크게 다가올 거로 생각한다. 2016년,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로 심각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고 난 뒤, 회복해 발매한 앨범들을 통해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비록 켄드릭 라마나 퓨처 같은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누구보다 강인함을 내비쳤던 래퍼가 죽음에서 돌아와 음악을 공개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베스트 랩 송(Best Rap Song) 후보에 선정된 곡 ‘WIN’은 래퍼이자 갱스터, 한 인간이 외치는 삶을 향한 간절한 포부다.

 

맥 밀러, 하늘로 띄우는 영광

지난해, 유난히 재능 있는 아티스트가 여럿 세상을 떠났다. 맥 밀러(Mac Miller)도 그중 한 명이다. 많은 아티스트와 팬의 귀감이었던 맥 밀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불러왔다. 세상을 떠난 맥 밀러와 그를 추모하는 팬들을 위로하듯, 생전 발매한 마지막 앨범 <Swimming>이 이번 그래미 어워드의 베스트 랩 앨범 후보에 자리했다. 삶과 죽음에는 귀천이 없으나, 맥 밀러가 그동안 보여줬던 음악들이 더없이 훌륭했기에 그 죽음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앨범 <Swimming>의 첫 번째 수록곡의 이름은 ‘Come Back to Earth’. 그래미 시상식이 진행되는 2월 10일만큼이라도, 그가 지구로 돌아오면 좋겠다고 느낀다.

 

 

메인 이미지 (왼쪽부터) Ella Mai via ‘Clash magazine’, Kendrick Lamar via ‘Medium’, H.E.R. via ‘last.fm’, Mac Miller via ‘Med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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