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음식’들을 모았다. 두 주인공의 만남의 계기로, 공허한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영화 속 음식들에 주목해보자.

 

<중경삼림> 속 샐러드

‘경찰 663’(양조위)은 언제나처럼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똑같은 샐러드를 주문한다. 점원 ‘페이’(왕페이)는 그런 경찰 663을 남몰래 짝사랑한다. 어느 날 경찰 663의 애인이 이별 편지와 함께 그의 아파트 열쇠를 페이의 가게에 맡긴다. 그 후 페이는 경찰 663이 집을 비운 사이 몰래 들어가 옛 애인의 흔적을 하나 둘 지우며 공간을 새롭게 꾸며 나간다.

영화 <중경삼림> 속 임청하와 금성무, 왕페이와 양조위 두 가지 전혀 무관한 에피소드를 한데 엮어주는 고리를 하는 장소가 바로 차찬텡(茶餐廳)이다. 극 중 페이가 일하는 공간인 차찬텡은 홍콩 어디나 편재한 패스트푸드점이자 로컬 레스토랑으로, 샌드위치나 간단한 토스트, 샐러드, 커피 등을 파는 가게. 경찰 663이 야간 근무 중 매일같이 들러 샐러드와 커피를 사 먹는 곳이자,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감정을 싹틔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중경삼림> 하면 파인애플 통조림이나 차슈 덮밥 같은 대표적인 음식들을 떠올리겠지만, 그보다는 이 차찬텡의 샐러드를 언급하고 싶다. 나란히 진열된 소스들, 유리 진열장 너머로 보이는 고기와 채소 토핑들은 볼수록 샐러드의 맛이 궁금해지게 만든다. 영화 속 배경이 된 공간은 테이크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지만, 현지에는 따로 좌석을 갖춘 차찬텡들도 많다.

<중경삼림> 2부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공간인 차찬텡

 

<화양연화> 속 완탕 국수

홍콩의 지역 매일 신문 편집장인 ‘초 모완’(양조위)과 수출회사의 비서로 근무하는 ‘수 리첸’(장만옥). 두 사람은 상하이 지역의 한 건물로 같은 날 이사한다. 둘 다 가정이 있지만 어쩐지 배우자들은 자리를 비우는 날이 더 많고 둘은 자주 오가며 부딪히는 과정에 깊어지는 감정을 느낀다. 시종 느릿하게 전개되며 별다른 정점에 이르지 못하는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닿을 듯 말 듯 서로를 비껴가며 끝내 가까워지지 못한다. 다만 영화는 흐릿한 이미지들과 행동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중첩적인 화면들을 통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공허하고 외로운 내면을 스크린에 투영한다.

치파오 차림으로 1인분의 보온병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리 첸의 모습. 해외 출장이 잦은 남편 때문에 홀로 외롭게 지내는 수 리첸은 늘 집 근처에서 파는 따뜻한 완탕 국수로 끼니를 해결한다. 그가 국수를 포장해오는 장면은 영화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아래는 포장을 마치고 계단을 오르는 수리 첸과 가게로 내려가는 초 모완이 서로를 비껴가는 영상이다. 두 주인공의 고독한 마음, 감정이 깊어질수록 겉으로는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시각화한 미장센으로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화양연화> 클립 영상

 

<첨밀밀> 속 병우유

1986년, 돈을 벌기 위해 대륙발 홍콩행 열차를 타고 온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우연히 만난다. 꿈을 좇아 홍콩에 왔지만 낯설고 외롭기만 한 타지에서 둘은 점차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에 빠진다. 두 주인공의 10년간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애잔한 여정을 따라가는 영화 <첨밀밀>은 개봉 당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상과 잔잔한 정서로 깊은 공감대를 끌어냈다.

생활력 강하고 이해타산이 빠른 이요의 눈에 소군은 그저 어리숙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 초반, 이요는 광동어도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소군을 꼬드겨 자신이 일하는 영어학원에 등록시키기도 한다(나중에 소군은 알면서도 속아줬다고 고백한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진전되는 건 새해 전야 이요가 갖고 있던 덩리쥔의 해적판 테이프를 함께 거리에서 팔면서부터다. 잘 팔릴 줄 알았던 테이프는 홍콩인들에게 철저히 외면받고,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쏟아진 비에 두 사람은 흠뻑 젖는다. 소군은 비를 맞으며 줄 서서 사 온 병우유를 이요에게 건네며 “내년엔 이 음료수나 팔자”고 말한다. 이 해맑고 순수한 한마디가 축축하게 가라앉은 이요의 마음을 따듯하게 녹여준다.

<첨밀밀> OST로 쓰인 덩리쥔의 ‘첨밀밀’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