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는 ‘6세대’로 분류되는 감독들이 있다. 89년 천안문사태를 직접 경험한 세대이며 작가주의 성격이 강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을 일컫는데, <17년 후>(1999)의 장위엔, <북경자전거>(2001)의 왕샤오슈아이, <여름궁전>(2006)의 로예,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지아장커가 대표적이다. 6세대 감독의 작품 중 중국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작품이 많을 만큼, 중국의 현실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이들 작품의 특징이다. 

지아장커(오른쪽)와 그의 페르소나이자 아내인 배우 자오 타오(왼쪽)

지아장커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응시하는 감독이다. 중국 사회는 빠르게 발전하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과 사라져가는 가치를 카메라에 담는다. 지아장커의 영화에는 실패가 일상인 청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졌으나 댐 개발로 사라져가는 도시, 노동자들이 평생을 바쳤으나 재개발로 사라지는 공장, 사회의 위협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빨리 잊으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지아장커는 계속해서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빠르게 변하고 많은 것이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치란 무엇일까. 여운이 긴 질문을 던지는 지아장커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임소요>

任逍遙 , Unknown Pleasures |2002|출연 조유위, 오경, 자오 타오, 왕홍웨이 

중국 북부에 위치한 ‘따퉁’은 중요한 탄광지대였지만 이제는 폐광촌이 된 도시다. 19살 ‘빈빈’(조유위)과 ‘샤오지’(오경)는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백수들이다. 빈빈은 곧 대학입시를 치를 여자친구가 합격하면 다른 도시에 갈 것을 알게 되고, 샤오지는 댄서 ‘차오차오’(자오 타오)에게 반한다. 하지만 차오차오는 동네 사채업자의 정부라서 두 사람의 사랑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두 청년은 은행을 털기로 마음먹는다.

이 영화에는 모티브가 된 사건이 있다. 2000년 중국 시골의 두 소년이 도시에서 취직하고 돈을 벌어 금의환향할 미래를 꿈꾸면서 따퉁으로 상경한다. 그러나 도시의 현실은 그들의 이상과 달랐고, 돈이 없는 두 소년은 사제폭탄을 만들어서 은행을 털기로 한다. 은행을 털기 전 부모에게 편지를 쓰는데, 둘 중 한 소년은 편지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대만 가수 임현제의 노래인 ‘임소요’의 가사를 쓴다. ‘임소요’는 장자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임소요> 트레일러

<임소요>는 모티브가 된 사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뭘 해도 어설픈 두 청년이 계속해서 실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영화다. 상징적으로 샤오지가 멋지게 오토바이를 타고 오다가 언덕 위를 오르는데 계속 미끄러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두 청년 모두 멋진 삶을 꿈꾸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없고, 세상은 기회도 주지 않는다. 당장 내일이 걱정인 이들에게 베이징올림픽 유치 같은 뉴스는 내가 사는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먼 나라의 사정 같다. 지아장커가 보여준 두 청년의 삶을 통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세상이 발전을 외치는 동안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는 청년들은 어떻게 소외되어 가고 있는가.

 

 

<스틸라이프>

三峽好人: Still Life|2006|출연 한 산밍, 자오 타오, 왕홍웨이

중국 인민폐 10위안에 새겨질 만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도시인 싼샤는 2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왔지만 댐 공사로 2년 만에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이다. 사라져가는 싼샤에 16년 전 집을 나간 아내와 딸을 찾아온 ‘산밍’(한 산밍), 2년째 소식이 없는 남편을 찾아온 ‘셴홍’(자오 타오)이 각각 찾아온다. 산밍은 싼샤에 오자마자 일을 하며 아내를 찾아보지만 쉽지 않고, 셴홍은 남편을 찾는 과정에서 여러 생각에 점점 불안함을 느낀다.

영화 제목인 ‘still life’는 정물화를 뜻하고, <스틸라이프>는 담배, 술, 차, 사탕 네 가지 정물을 소제목으로 보여준다. 중국인들은 이 네 가지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는데, <스틸라이프> 속 노동자들의 삶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절경을 제대로 볼 여유도 없이,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한 노동만으로도 삶이 벅차다.

<스틸라이프> 트레일러

<스틸라이프>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영화다. 영화의 배경인 싼샤도,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욕망도 사라져 간다. 싼샤는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고, 노동자들은 생존만을 목표로 버티듯 살아간다. 싼샤의 자연과 노동자들의 검게 탄 육체는 쉴 틈 없이 움직이는데 왜 이들에게 주어지는 건 사라짐일까. 많은 것이 사라지지만 삶은 계속될 것이고, 산밍이 가족을 찾기 위해 견디듯 누구에게나 지켜야만 하는 가치가 있을 거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 안에서 그 가치를 지켜내는 일의 숭고함을 <스틸라이프>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24시티>

24 City|2008|출연 젠빈천, 조안 첸, 자오 타오, 여려평

1958년 대약진을 국가정책으로 내세운 중국은 서남부 쓰촨성 청두에 ‘팩토리 420’이라는 군수품 공장을 세운다. 3만여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까지 15만 명에게 삶의 터전이 되지만, 50년간 가동되던 ‘팩토리 420’은 정부의 정책 아래 재개발되면서 문을 닫고 고급아파트 단지인 ‘24시티’가 들어서게 된다.

<24시티>는 ‘팩토리 420’과 연을 맺은 8명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터뷰 중 일부는 전문배우가 실제 겪은 일처럼 연기를 한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절반 정도 섞인 셈인데, 인상적인 건 카메라 앞에 선 일반인들이다. 인터뷰하는 인물들은 직접 노동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은 채 과거를 회상하고, 인터뷰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노동에 열중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노동자들은 어색해하거나, 웃음을 참는다.

<24시티> 트레일러

‘팩토리 420’이 자신의 삶에 흔적을 남긴 이들은 수없이 많다. 시간이 지나면 청두의 ‘24시티’만 기억하고 ‘팩토리 420’을 기억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질 거고, 누군가는 ‘팩토리 420’에 꿈을 안고 왔다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바치는 말로, <24시티>는 ‘너는 점점 사라져가지만 나에게 찬란한 삶을 주었단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당신이 머물렀던 공간이 사라지고 소중한 기억을 세상이 몰라줄지라도, 당신의 삶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천주정>

天注定 , A Touch of Sin|2013|출연 강무, 왕바오창, 자오 타오, 나람산

<천주정>은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광부 ‘따하이’(강무)가 마을 사람들을 착취하고 혼자 부를 누리는 마을 촌장에게 대항하는 이야기. 두 번째는 청부살인업자 ‘조우산’(왕바오창)이 오랜만에 본인의 고향에 돌아와서 어색해하는 가족들과 마주하는 이야기. 세 번째는 유부남 애인과의 관계를 끝내려는 사우나 직원 ‘샤오위’(자오 타오)가 위기에 처하는 이야기, 네 번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청년 ‘샤오후이’(나람산)가 유흥업소 웨이터로 일하면서 종업원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지아장커의 전작들이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면, <천주정>은 무협, 멜로 등 다양한 장르 영화의 특징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작품이다. 각 에피소드 속 인물들의 행동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모두 실제로 중국 각지에서 벌어진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천주정>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중국에서 생기는 다양한 갈등을 보여준다.

<천주정> 예고편

영화제목인 ‘천주정’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을 뜻한다. 지금 중국사회의 하늘은 ‘발전’일지도 모른다.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사회는 <천주정> 마지막에 등장하는 경극 속 대사처럼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죄 없는 이들을 죄인으로 몰지도 모른다. 약한 게 죄가 되는 세상에서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영화보다 더 극단적일지도 모른다. 그 누가 이들의 선택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