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영국의 젊은이들은 미국에서 건너온 로큰롤과 블루스 음악에 매료되었다. 대서양을 건너온 경쾌하고 빠른 박자와 자신의 개성을 찾는 ‘Do It Yourself’ 문화는 영국의 젊은 층에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1960년대,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영국의 밴드들은 밝고 경쾌한 록 음악으로 무장하여 대중음악의 본토인 미국시장에 침공한 것이다. 이른바 1960년대의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먼저 비틀스(Beatles)가 선봉에 나섰고 뒤를 이어 롤링스톤스(Rolling Stones)가 좀 더 과감한 스타일과 도발적인 패션으로 진격의 깃발을 올렸다.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Sympathy for the Devil’ 연주(1969). 이들의 공연은 자주 폭력사태에 휘말렸다

‘롤링스톤스’라는 밴드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어린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가 브라이언 존스를 만나면서 시작된 밴드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시카고 블루스 음악에 열광했다. 이들은 1958년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영국 공연을 보고 인생의 진로를 정했으며, 블루스 밴드를 출범하면서 마침 테이블 위에 있던 음반을 보고 즉흥적으로 밴드명을 정했다. 머디 워터스의 ‘Rolling Stone’라는 곡이 수록된 음반이었다. 이로써 지난 반세기 동안 2억 장의 음반을 판매한 레전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Muddy Waters ‘Rolling Stone’ at New Port Jazz Festival(1960)

머디 워터스가 록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 ‘Muddy’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루이지애나 삼각주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에 듣고 자란 블루스곡 ‘Catfish Blues’를 편곡한 ‘Rolling Stone’(1950)으로 데뷔했다. 그의 데뷔곡은 세계 제1의 음악 매거진 이름으로 쓰였고,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에 영감을 주었다. 에릭 클랩튼은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라다녔고 자신의 공연에 수시로 초청했다.

1964년에 다시 영국을 방문한 머디 워터스는 맨체스터 Chorltonville 역에서 공연을 가졌다

세계적인 인기 밴드가 된 롤링스톤스는 시카고 공연이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뿌리와 같은 머디 워터스의 공연을 보러 다녔고, 1981년 겨울에는 공연 일주일 전에 시카고로 미리 들어와 그가 운영하던 블루스 클럽 ‘Checkerboard Lounge’를 찾아 후일 유명해진 합동 공연을 성사시켰다. 이날 협연이 사전에 기획된 것인지 우연한 이벤트인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해적판으로 떠돌던 이날의 공연 실황은 후일 정규 음반 <Live at the Checkerboard Lounge, Chicago 1981>(2012)으로 출반되었다.

델타 블루스 오리지널 ‘Baby Please Don’t Go’이 연주될 무렵 롤링스톤스 멤버들이 Checkerboard Lounge에 입장했다

머디 워터스의 유명한 오리지널 ‘Mannish Boy’를 협연하는 롤링스톤스

Checkboard Lounge에서의 공연 후 머디 워터스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듬해 에릭 클랩튼과 함께 한 마지막 공연 후 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983년 자는 도중에 조용히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수많은 블루스 뮤지션과 팬들이 그의 장례식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시카고시는 일부 지역을 ‘Honorary Muddy Waters Drive’로 지정하였고 그를 기리는 행사를 수시로 기획한다. 그가 1972년부터 운영하던 블루스클럽 Checkboard Lounge는 건물 안전상의 문제로 문을 닫았으나 여전히 많은 팬들이 그곳을 찾고 있다.

이제는 문을 닫은 블루스클럽 Checkboard Lounge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열린 머디 워터스 추모공연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