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프랑스 만화가 바스티앙 비베스. 때로는 톡톡 튀고, 때로는 서정적인 그의 작품은 꼭 왕사탕 같다. 입천장에 상처라도 낼 것처럼 까끌까끌하지만 오래 굴려 먹을수록 단맛이 더 진해지고, 녹아버린 후에도 뒷맛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왕사탕 말이다. 그중에서도 오래 음미할수록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두 편의 그래픽노블과 한 편의 카툰 모음집을 소개한다.

 

그래픽노블

바스티앙 비베스의 간단한 드로잉
<내 눈 안의 너(Dans mes yeux)>(2009)


1984년생 바스티앙 비베스(Bastien Vives)가 본격적으로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건 2009년부터다. 화가이자 사진작가, 영화 세트 디자이너인 아버지 덕분에 자연스레 예술을 접하며 자란 그는 그래픽 아트와 애니메이션을 공부했고, 스물두 살 때 친구들과 만화 아틀리에 망자리(Manjari)를 설립한다. 진지한 주제에 톡톡 튀는 감성을 결합한 작품을 만들어 온 비베스는 바스티앙 샹막스라는 필명의 웹 카투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13년에는 부천 국제만화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하기도 했다.

수영장 물맛처럼 쌉쌀한 첫사랑의 맛, <염소의 맛(Le gout du chlore)>(2008)
<사랑은 혈투(La boucherie)>(2008)


비베스는 시시각각 변해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처럼 설익은 청춘의 조각들을 작품에 녹여낸다. 너무 사소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순간이나 감정을 예민하게 잡아채기도 한다. 그의 그림을 이루는 선이나 색채가 정리되지 않은 듯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청춘이란 완성되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 그렇지만 이 삐뚤빼뚤한 선에서는 단단한 무언가와 친근한 느낌, 다채로운 색깔이 우리를 매료시킨다.

<내 눈 안의 너(Dans mes yeux)>(2009)
얇은 볼펜과 색연필만 사용한 듯한 일러스트가 인상적이다


그래픽노블 <내 눈 안의 너>는 마치 카메라로 영상을 찍을 때처럼 ‘나’의 눈에 비친 풍경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러니까 제목이 곧 내용인 셈이다. 사랑에 빠지는 첫 순간에서부터 상대를 떠나보내는 순간까지, 캠퍼스 커플의 짧은 사랑을 다룬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건 오직 ‘너’의 표정과 행동, 입 밖으로 내뱉은 말들뿐이다. 심지어 화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덕분에 우리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의 한 장면처럼, 화자 그 자체가 되어 세계를 가득 채운 ‘너’를 바라보게 된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미묘한 떨림이나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추측할 때의 불안감, 관계의 끝에 다다랐을 때의 공허함 역시 오롯이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욱 아릿하게 다가오는 건 화자를 넘어 ‘너’의 시선에 도달했을 때다. 아직 누군가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상황에 이입했을 때, 감정의 결이 묘하게 달라진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저릿해 오는 건,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의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폴리나(Polina)>(2011)
2012년 만화 비평가협회 대상을 받으며 비베스는 ‘젊은 거장’ 반열에 오르게 된다


단어 몇 가지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도 있다. 성별이나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이끌어주는 관계, 이는 무용수 폴리나의 성장담을 담은 그래픽노블 <폴리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토록 꿈꾸던 발레단에 입단한 폴리나는 보진스키 교수로부터 개인 공연 제안을 받으며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진다. 무엇 하나라도 결정을 내리기엔 아직 어리고, 보진스키 교수의 조언들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가 방향을 잡기 시작한 건 ‘왜’ 춤을 추고 싶은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다. 발레단 밖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겪으며 그녀는 지금껏 보진스키가 가르쳐주려 했던 것이 단순히 춤만 추는 무용수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무용수가 되는 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의 그녀를 만든, 질문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사실조차 보진스키가 알려주었던 것이다.

영화 <폴리나, 삶을 춤추다(Polina, danser sa vie)> 포스터
영화 <폴리나> 트레일러 
그래픽 노블 <폴리나>를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비베스 자신도 ‘춤이라는 매개로 예술과 성장, 인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정의한 만큼, <폴리나>에는 다채로운 주제들이 겹겹이 얽혀 있다. 이러한 주제들은 보진스키와 폴리나의 관계를 자양분 삼아 서로 엉키지 않고 조화롭게 피어난다. 누구보다 먼저 폴리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묵묵히 길잡이 역할을 자청했던 보진스키는 말 그대로 키다리 아저씨였다. 그렇지만 키다리 아저씨도 늘 완벽하지만은 않다. 그에게도 가끔은 기댈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훗날 폴리나가 보진스키를 찾아와 손을 내미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된다.

 

카툰 모음집

<바스티앙 비베스 블로그 1(Bastien Vives Blog 1)>(2013)


위의 두 작품에 비하면 카툰 모음집 <바스티앙 비베스 블로그>는 위의 통통 튀는 탁구공 같다. 비베스가 틈틈이 블로그에 올린 짧은 만화를 엮은 이 작품은 가족이나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을 도발적으로 깨부순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다정하게 속삭이는 연인은 사실 서로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이 없고,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아이에게 아빠는 결혼생활의 이상과 현실을 신랄하게 털어놓는다.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라며 접이식 칼을 선물한 할아버지에게 손자는 “이걸로 댄스파티에 데려가고 싶은 여자애를 위협해도 되냐”고 묻고, 아빠가 과거에 그렸던 만화를 발견한 딸은 캠핑카 커버 판매원이 된 아빠에게 지금 행복한지 묻다 울기도 한다. 놀랍게도 비베스는 이 만화를 전혀 풍자적 의도 없이 그렸다고 고백한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 그린 작품에서 이 정도의 블랙 코미디가 묻어 나온다니, 작정했을 때는 과연 어떤 작품이 탄생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바스티앙 비베스 블로그 2(Bastien Vives Blog 2)>
인물 간의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시각적 디테일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아직까지 그래픽노블은 한국에서 그리 주목받는 분야가 아니다. 만화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은 탓이다. 그렇지만 그래픽노블은 이야기를 통해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바스티앙 비베스는 그걸 재미있게 담아내는 법을 안다. 우리가 그래픽노블에, 비베스의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수영은 왜 그만뒀어?”
“그냥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러면 네 길은 뭔 것 같은데?”
“그건 몰라.”
“넌?”
“글쎄……. 사실 난 각자 자기 길이 있기는 한 건지 잘 모르겠어.”
“무슨 생각해?”
“이런 거 생각해 봤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 같은 거…….”

-<염소의 맛> 중에서

 

바스티앙 비베스 인스타그램

메인 이미지 바스티앙 비베스 <사랑은 혈투> 가운데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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