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월 30일 자 매일경제신문 9면에 한 광고가 실렸다.

“획기적인 첨단 복사인쇄기 - 리소그래프(RISOGRAPH)
복사, 인쇄, 제판, 등사 한 대에서 처리, 5가지 칼라와 분당 120매의 연속복사인쇄.
사용처: 각급학교, 학원, 관공서, 기업체, 교회, 백화점, 복사점, 금융기관.”

지금은 사무실에서 보기 힘든 이 인쇄기는 그 후 오랫동안 교회 주보나 홍보물, 소규모 프린트물 제작 따위에나 쓰이며 잊혔다. 석판화를 이르는 리소그래프(Lithograph)와 헷갈리기 쉬운 이 이름이 독립출판물 시장에서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완전히 매끈하고 실제에 가까운 이미지들과 달리 거칠고 낡은 듯한 리소그래프의 매력을 재발견한 소수 창작자의 주목 덕택이다.

이 ‘리소그래프’라는 인쇄기는 일본 리소과학공업주식회사에서 개발한 실크스크린 방식의 디지털 공판인쇄기다. 작은 구멍으로 잉크가 묻어나오도록 만들어졌고 이렇게 묻어 나온 작은 색점들의 선명도와 조밀도에 따라 색의 옅고 짙음의 표현이 가능하다. 흔히 쓰이는 옵셋인쇄(offset printing- 색이 미리 조합되어 인쇄됨)와 달리 한 번에 한 가지 색만 인쇄할 수 있어(spot color process- 별색인쇄), 잉크에 없는 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색의 판을 겹쳐 찍어 조합해야 한다. 위 광고에 따르면 20여 년 전에는 적, 청, 녹, 갈, 흑의 5가지 잉크를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20여 개 색의 잉크로 더 다양한 색 표현이 가능해졌고, 색의 조합 가능성은 그만큼 더 무궁무진해졌다. 2016년 10월 현재 리소 사는 금색 잉크와 A2 사이즈까지 출력 가능한 모델을 내놓았다. 이전까지 최대 출력 사이즈가 A3에 불과했다는 점, 코팅된 종이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마저도 리소그래프의 매력을 더할 뿐이다. 한국의 소규모 서점이나 독립출판물 시장에서도 이 리소그래프 인쇄물을 접할 수 있다. 혹시 지금 앉아있는 방 안을 둘러보면 리소그래피로 의심되는 포스터가 걸려있을지도 모르겠다. 도톰한 종이에 색점이 살아있는 빈티지한 색면이 인쇄된 책이나 종이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본 적 있는 독자라면 기꺼이 관심을 둘 두 출판사를 소개한다.

 

하토프레스(@hatopress)

2009년 영국 런던에서 문을 연 ‘하토프레스’는 인쇄 및 출판사인 ‘하토 프레스’, 출판물, 전시, 교육과 워크숍에 특화된 디자인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하토’, 그리고 인터렉티브 디자인 스튜디오 ‘하토 라보’ 세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운영되고 있다. 독특한 이름은 비둘기를 의미하는 일본어 ‘ハト(하토)’에서 따온 것이다. 영국에 처음 생긴 사설 출판사 중 하나였던 ‘도브스(Doves) 출판사’(영국 미술공예 운동을 주도하던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 켈름스코트 출판사(Kelmscott Press)를 만들었고, 그 흐름 속에서 1900년 도브스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두 출판사 모두 아름답고 장식적인 서체와 디자인으로 유명하다.)를 오마주하면서 리소그래프의 고향인 일본을 가리키는 의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하토프레스는 리소그래프를 이용하여 실험적이고 아름다운 소규모 책들을 인쇄, 출판한다. 이들이 출판사를 설립하던 2009년만 해도 리소그래프는 디자인과 출판업계에서 생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오히려 그 덕에 이곳에서는 뭔가 다른 것을 찾는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활발한 교류, 더 다양하고 독창적인 리소그래프 실험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더불어 점차 많은 이들이 이 결과물들을 확인하고 리소그래프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토프레스는 리소그래프 인쇄의 장점을 장인적이고 촉각적인 독특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 대두유로 만든 소이잉크(Soy ink)를 사용해 환경친화적이라는 점, 경제적이고, 빠르고, 비용이 저렴하다는 점을 꼽는다. 하토프레스의 책들은 한국의 작은 책방들에서도 소규모로 유통되고 있다.

 

코우너스(@cornersinfo)

‘코우너스’는 조효준, 김대웅, 김대순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로, 리소그래프 인쇄소와 출판사를 운영한다. 한국에 리소그래프라는 프린팅 기법을 알린 작은 책 <RISO TOUR>(2015)는 코우너스 대표인 조효준, 코우너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스튜디오 오와이이(OYE)’의 오혜진(@ohezin)이 함께 네덜란드의 리소그래프 인쇄 작업소 세 곳을 돌아보고 만든 책이다. 물론 코우너스에서 리소그래프로 인쇄했다. 표면이 매끄럽게 코팅되지 않은 종이와 인쇄 질감을 어루만지면서 겹쳐 찍기를 통해 만들어진 독특한 빛깔을 느끼며 읽을 수 있도록 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리소그래프를 소개하는 시각적, 내용적, 촉각적 방식을 모두 동원한 책이다. 가죽 장정이 입혀진 이 책은 아주 얇고 작은 책이지만 한국에 리소그래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자부심이 단단하게 만져진다.

인쇄소를 열면서 경제적 도움이라는 장점을 염두에 둔 것, 지금은 많은 디자이너와 학생들이 소규모 인쇄를 위해 찾는 곳이라는 점은 초창기 하토프레스와 비슷하다. 리소그래프 방식은 특히 사진을 인쇄할 경우 거친 색점 효과와 질감이 두드러지며 일반 인쇄나 필름 인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차이를 보인다. 물론 어떤 색들을 조합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많은 실험이 뒤따른다. ‘노말에이’와 코우너스가 협업하는 포토진 시리즈 ‘컴비네이션(Combination)’은 최근 이런 실험의 한 시도로 장우철의 <406 ho>를 3도 인쇄로, 니나안의 <Snowflakes>를 4도 인쇄로 펴냈다.

 

(주)리소코리아 홈페이지
하토프레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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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이미지 출처 @cornersinfo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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