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낙태를 단순히 합법, 또는 불법으로 가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회가 낙태의 윤리적, 종교적 측면을 두고 끝없는 논쟁을 펼치는 중에도,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낙태 결정을 두고 삶이 파괴되는 고통스러운 고뇌의 시간을 거듭하며 소리 없는 절규를 쏟아내고 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쉽게 판단해서도 안 되는 문제이자, 결코 외면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문제다. 낙태와 출산, 극한 상황에 처한 여성의 갈등과 고뇌를 담은 충격적인 작품 <24주>을 포함하여, 낙태를 소재로 한 몇몇 영화들을 살펴본다. 낙태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단순히 낙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며, 주인공의 딜레마에 함께 뛰어들어 각자의 답을 찾아 헤매게 하는 영화 세 편이다.

 

<24주>

24 Weeksㅣ2017ㅣ감독 앤 조라 베라치드ㅣ출연 줄리아 옌체, 비얀 미들, 요하나 가스트도프

낙태가 합법이든 불법이든, 뱃속의 생명을 두고 낙태를 결정하는 일은 언제나, 당연히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같은 윤리적인 문제와 충돌한다. <24주>는 낙태가 합법인 독일에서 다운증후군 태아를 임신하게 된 여성이 낙태를 두고 고민하는 24주를 그린 영화다. 출산을 앞두고 느끼는 설렘과 행복도 잠시, 곧 태어날 아기에게 치명적인 장애가 연거푸 발견되면서 낙태와 출산 사이 선택의 기로에서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주인공 ‘아스트리드’(줄리아 옌체)의 고뇌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아스트리드가 중요한 순간에 맞닥뜨릴 때마다 돌연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은 섬뜩할 정도로 강렬해서, 스크린 밖에 앉아 객관적인 사고와 태도를 취하려는 관객의 시도를 번번이 묵살한다. 마치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쏘아붙이는 것 같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할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첫 장편 영화 <투 머더즈>(2013)로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의 신작으로,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67회 독일영화상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입상한 충격적인 화제작이다.

<24주> 예고편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Months, 3 Weeks & 2 Daysㅣ2008ㅣ감독 크리스티안 문쥬ㅣ출연 아나마리아 마린차, 로라 바실리우, 블라드 이바노브

대학생 ‘가비타’(로라 바실리우)는 기숙사에서 짐을 꾸리느라 분주하다. 커다란 여행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 넣은 뒤 제모도 하고 매니큐어도 바른다. 기숙사 룸메이트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차)와 함께 시내의 허름한 호텔을 예약하는데, 실은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가비타의 불법 임신중절을 위해서다. 제목을 봐도 그 내용을 단번에 짐작하기 어려운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1980년대 루마니아에서 피임과 낙태가 금지되고 불법 낙태에 대해 강력한 처벌이 뒤따랐던 시기, 한 여대생이 불법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나서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끝내 가비타의 몸속을 빠져나온 형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핏덩이와 고작 비닐봉지 하나 깔고 제대로 된 안전장치도 없이 이뤄진 낙태 현장을 시종 직선적인 앵글과 롱테이크 기법으로 담아낸 장면 연출은 건조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다. 1987년 루마니아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불법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여대생의 딜레마를 어둡게 가라앉은 화면과 음악을 철저히 배제한 사실적인 연출을 통해 그려낸 수작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및 두 개 부문 수상.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예고편

 

<베라 드레이크>

Vera Drakeㅣ2004ㅣ감독 마이크 리ㅣ출연 이멜다 스턴톤, 리처드 그레이엄, 에디 마산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1950년대, 영국의 뒷골목에서 무분별하게 자행되던 낙태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낙태를 고심하는 여성이 아닌, 원치 않는 임신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소녀들을 위해 낙태 수술을 해주는 평범한 주부 ‘베라’(이멜다 스턴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지나치게’ 선량한 심성 때문에 딱한 처지에 놓인 소녀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20년 넘게 낙태 수술을 감행해 오던 베라. 처음으로 자신의 불법 시술로 인해 죽을 뻔한 여성이 생기면서 평범하던 일상은 산산이 조각난다. 영화는 값비싼 수술비를 지불하고 안전한 의료 시설에서 중절 수술을 받는 부유층과 생활고로 불법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 두 계층 간의 양면성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평화로운 가족 파티 현장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활기찬 중년 여성의 모습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베라가 떨리는 눈동자로 두려움과 죄의식이 복잡하게 얽힌 심경을 표출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영화의 마지막, 경찰서로 향하는 베라의 뒷모습을 비추며 천천히 아래로 향하는 카메라 앵글은 곧, “그저 곤경에 처한 여자들을 도와준 것뿐”인 그에게 돌을 던질 수도, 무작정 끌어안을 수도 없는 모든 관객들의 쓸쓸한 시선이다.

<베라 드레이크>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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