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미국의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 중에는 러시아 이민자 가정 출신이 많았다.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의 부모는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이다. 그는 뉴욕대와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CBS방송사에 취업해 전속 지휘자로 일하면서, 당시 알려지지 않은 동유럽 음악들을 소개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음악 편곡과 작곡 업무를 시작했다가, 영화 음악에도 손을 대어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영화 <All That Money Can Buy>(1941)로 첫 아카데미를 수상했다. 당시 최고 거장이던 오손 웰즈(Orson Welles)의 영화와 TV쇼의 음악을 전담했으며, 그의 진가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만나 미스터리 영화음악에 손대면서 더욱 빛을 발했다. 참여한 50여 편의 영화 음악 중 영화사에 길이 남은 작품을 소개한다. 대부분 익히 들어본 친근한 곡일 것이다.

 

<Vertigo>(현기증, 1958)

그가 모두 일곱 편의 히치콕 감독 영화음악을 맡을 정도로, 두 사람은 밀접하게 일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명장면마다 삽입된 음악이 빛을 발하여 히치콕과 허먼 간 최고의 콜라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당시 할리우드의 음악 연주자들이 파업 중이라 유럽에서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허먼 자신이 직접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지 못한 유일한 작품이라 그의 아쉬움을 샀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히치콕의 영화는 강박에 관한 것이라 배경음악 역시 나선형과 원형 위에 구성되어야 하는데, 허먼은 이 점에서 히치콕이 강박의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점을 진정 잘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두 사람의 단단한 화학적 결합을 인정한 바 있다.

영화 <Vertigo>의 메인 테마곡

 

<사이코>의 ‘The Murder’(1960)

히치콕 감독이 영화 <사이코> 성공의 33%가 음악 덕분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영화 내내 긴장과 음산한 분위기 형성에 음악의 역할이 컸다. 특히 영화에 수록한 40곡 중에 ‘Prelude’와 ‘The Murder’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차용되어, 이 영화를 보지 않고도 멜로디에 익숙할 정도로 영화 역사상 걸작으로 손꼽힌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던 ‘샤워 장면’은 히치콕 감독이 원래 음악 없이 하려고 했으나, 허먼 감독이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의 곡 ‘The Murder’을 수록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여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장면이 완성되었다. <사이코>의 영화음악 앨범은 2019년 <피치포크>의 영화음악 순위 8위에 올랐다.

영화 <사이코>의 샤워 장면에 수록한 ‘The Murder’

 

<Twisted Nerve>(1968)의 휘파람

히치콕 감독과 허먼과의 협업은 영화 <Torn Curtain>(1966) 제작 중에 음악 스타일에 대한 이견을 보이며 끝이 났다. 당시 할리우드의 트렌드는 영화음악도 인기 장르를 쫓아 재즈나 팝을 선호했지만, 허먼은 자신의 뿌리인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 감독에 이어, 영국의 불링(Boulting) 형제의 작품 <Twisted Nerve>을 맡게 되었는데, 다운 증후군을 가진 환자가 살인극을 벌이는 심리 스릴러 영화였다. 허먼이 작곡한 이 영화의 타이틀곡 중 주인공이 타겟이 된 여성의 뒤를 밟으며 내는 휘파람 버전이 유명한데, 후일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2003)에 수록되어 널리 퍼졌다. 이외에도 <데스 프루프>(2007),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2011~)나 수많은 광고 영상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휘파람 대회의 심사 곡으로도 쓰인다.

영화 <Twisted Nerve> 타이틀곡의 휘파람 버전

 

<택시 드라이버>(1976)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영화로, 이 영화의 내용상 음악의 중요성을 알았던 감독이 평소에 존경했던 허먼에게 특별히 음악을 부탁하였다. 스트레스 장애와 불면증을 앓는 위험한 외톨이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몽롱하고 나른한 색소폰 연주곡으로 구성되어,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에 오른 걸작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음악을 끝내고 197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차기작 감독인 래리 코헨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서 자던 중 6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이 영화와 함께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Obsession>까지 두 작품 모두 유작이 되었고, 두 작품 모두 아카데미 오리지널 음악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 <Taxi Driver>의 메인 테마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