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을 싱잉 드러머(Singing drummer)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드러밍 싱어(Drumming singer)로 불러야 할까? 비틀스의 링고 스타나 퀸의 로저 테일러도 드럼 셋(set)에 앉아 리드 싱어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지만, 밴드에서 리드 보컬리스트로서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 드럼이 비교적 큰 몸동작을 필요로 하는 악기이므로 드럼을 연주하면서 노래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고, 무대 뒤편에 위치하여 관객의 주목을 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래 소개하는 이들은 리드 보컬리스트로서 비중이 큰 데다가 밴드의 시그니처 송을 부르기도 한다.

 

카펜터스의 카렌 카펜터

카펜터스의 <Close to You>(1970)의 타이틀곡

낮은 음역의 맑은 목소리로 정상의 인기를 누린 카렌 카펜터(Karen Carpenter)가 원래 드럼을 연주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피아노를 친 오빠의 재즈 트리오에서 드럼을 연주하다가, 1969년 오빠와 함께 팝 듀오 카펜터스(Carpenters)를 결성하여 9,0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한 싱잉 스타로 부상했다. 오빠의 권유에 따라 발라드를 노래할 때만 무대 전면에 나섰고 그 외에는 드럼을 치면서 노래를 했으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갈수록 드럼 셋을 벗어나 노래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1983년 카렌이 자택에서 거식증에 따른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듀오는 종료되었고, 이는 거식증이 사회의 조명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의 돈 브루어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We’re an American Band’(1973)

미시건 출신의 드러머 돈 브루어(Don Brewer)는 동향의 동갑내기 기타리스트 마크 파너(Mark Farner)을 만나 1969년 4인조 밴드를 구성하고, 고향을 지나는 철도 노선을 따라 록 밴드 이름을 정했다. 두 사람은 함께 리드 보컬을 맡아 ‘We’re an American Band’(1973), ‘The Loco-Motion’(1974)을 빌보드 정상에 올리면서 197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 밴드로 부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견 충돌과 반목이 심해지며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했고, 최근에는 돈 브루어를 중심으로 다시 뭉쳐 지금도 연주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키스(KISS)의 피터 크리스

네번째 앨범 <Destroyer>(1976)에 수록한 ‘Beth’

기괴한 화장과 화려한 무대 연출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하드 록 밴드 키스(KISS)의 첫 빌보드 톱10은 의외로 발라드 ‘Beth’(1976)였다. 이 곡을 작곡하고 노래를 부른 캣맨(Catman) 피터 크리스(Peter Criss)가 창단 멤버 진 시몬즈와 폴 스탠리에게 고용되었던 것도 소울이 넘치는 그의 허스키 목소리가 큰 역할을 했다. ‘Beth’ 외에도 ‘Black Diamond’, ‘Hard Luck Woman’ 등 키스의 많은 히트곡에서 그는 리드 보컬을 맡았다. 하지만 창단 멤버들과 불화를 겪게 되며 해고되었고, 솔로 전향 후 앨범 판매가 연속 저조하자 최근에는 가끔 키스의 순회 연주에 동참하는 사이로 돌아왔다.

 

이글스(Eagles)의 돈 헨리

이글스의 최고 히트곡 ‘Hotel California’(1976)를 부른 돈 헨리

197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이글스는 우리에게 수많은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남겼고, 이제까지 2억 장의 음반을 판매하고 그래미상을 6회 수상한 슈퍼 밴드였다. 다섯 명의 멤버 대부분 싱어송라이터였으며, 그중에서도 드러머인 돈 헨리(Don Henley)는 소울이 넘치는 목소리로 ‘Witchy Woman’, ‘Desperado’, ‘One of These Nights’, ‘Hotel California’, ‘The Long Run’ 등 발라드 히트곡 대부분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다. 그는 그룹이 해체된 1980년 이후 솔로 앨범 다섯 장을 출반했고, 창단 멤버 중 하나인 글렌 프레이(Glenn Frey)가 사망한 2016년 이후 옛 멤버들이 다시 뭉쳐 그룹 활동을 재개했다.

 

제네시스의 필 콜린스

첫 솔로앨범 <Face Value>(1981)에 수록한 ‘In the Air Tonight’은 그의 시그니처 곡이다

싱어송라이터와 영화음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를 드러머로 기억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는 다섯 살부터 장난감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한 정통 드러머였다. 1970년대 피터 가브리엘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Genesis)가 새로운 드러머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처음에는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백킹 보컬을 맡았으나, 피터 가브리엘이 밴드를 떠난 후 리드 보컬리스트의 자리까지 떠안았다. 그는 그룹 활동과 솔로 활동을 병행하며 지금까지1억 5,000만 장의 앨범을 판매하고 그래미를 8회 수상한 슈퍼스타로 발돋움했다.

 

앤더슨 팩(Anderson Paak)

데뷔 앨범 <Malibu>에 수록한 ‘Come Down’(2016)

한국인 어머니를 둔 R&B 스타 앤더슨 팩 역시 드러머였다. 가족이 운영하는 교회에서 드럼을 치다가 미국에 유학 온 한국인 부인을 만나서 결혼했고, 닥터 드레(Dr. Dre)의 음반 <Compton>(2015)에 참여하면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앨범 <Oxnard>(2018)과 <Ventura>(2019)로 2년 연속 그래미를 수상하면서 이제는 정상급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자신의 그룹 The Free National과 함께 활동하며 드럼 외에도 기타, 베이스, 피아노를 연주하는 멀티 인스트루멘털리스트이며, 프로듀싱 영역에도 발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