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탈리 콜(Natalie Cole)은 1970년대 중반에 R&B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재즈 음악으로 둘러싸인 유복한 환경에서 다양한 음악을 듣고 자랐으나, 그중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제니스 조플린에 열광하면서 R&B와 록에 심취했다. 대학 졸업 후 클럽에서 노래하면서, 아버지 냇 킹 콜(Nat King Cole)의 후광을 더해 일찍 R&B 가수로 데뷔하였다. ‘This Will Be’(1975), ‘Inseparable’(1975)와 같은 히트곡이 연이어 그래미를 수상하면서, 언론은 “냇 킹 콜의 딸”이란 사실 보다 “New Aretha Franklin”이라는 별칭으로 그를 부각했다. 실제로 아레사 프랭클린과는 묘한 라이벌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와 듀엣으로 편집한 ‘Unforgettable’(1991)

하지만 그는 약물 중독에 빠져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1983년에는 코네티컷의 알코올중독자 치료시설에 6개월 동안 지내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에 컴백 음반 <Everlasting>(1987)이 ‘Pink Cadillac’과 같은 히트곡을 내며 다시 차트 상위권에 복귀하였다. 이 음반은 100만 장이 팔리며 그의 첫 플래티넘으로 기록되었다. “냇 킹 콜의 딸”이라는 후광을 싫어했고 공연장에서도 아버지의 히트곡 부르기를 주저했던 그는, 열세 번째 앨범 <Unforgettable>(1991)에서 아버지의 생전 히트곡 ‘Unforgettable’을 자신의 목소리와 기술적으로 합성하여 듀엣으로 발표했다. 이 곡은 그래미 4관왕을 안았고, 미국에서 700만 장이 팔리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부녀 간의 두번째 듀엣곡 ‘When I Fall in Love’(1996)는 그래미 2관왕이 되었다

아버지 냇 킹 콜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유독 더 많이 들을 수 있다. 1940년대 부드러운 음색으로 인기를 끌었던 크루너(Crooner, 마이크를 이용하여 부드러운 창법으로 노래하던 인기 팝 가수) 중 한 명이었고, 킹 콜 트리오(King Cole Trio)를 구성한 후대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선구자였다. 그의 히트곡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1946), ‘Nature Boy’(1948), ‘Mona Lisa’(1950), ‘Too Young’(1951)은 여러 주 동안 음악 차트 정상에 머물렀다.

나탈리 콜과 냇 킹 콜

다섯 아이 중 둘째였던 나탈리 콜은, 여섯 살에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앨범 <The Magic of Christmas>에서 노래할 정도로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나탈리가 15세로 가수로 본격 데뷔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45세의 나이에 폐암이 발견되어 갑자기 생을 마감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킹 콜 트리오의 히트곡 ‘For Sentimental Reasons’(아폴로극장, 1955)

원래 가수 대신 아동 복지사를 꿈꿨던 나탈리는,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하다가 우연히 직업적인 가수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유산에 올라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그는 중년으로 접어들자, 노래는 부드러워졌고 오디오 기술 발전으로 아버지와 듀엣으로 노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술적으로 이런 것은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음성을 트랙에서 따와서 새로운 트랙에 넣고 배열하고 맞추는 것은, 이전에는 시도조치 되지 않았다. 노래의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들이 듣다가, 우리 모두 감동에 사로잡혔다. 그건 정말 대단했다. (LA타임스와의 인터뷰)

냇 킹 콜의 1961년 버전을 편집한 듀엣 송 ‘The Christmas Song’

음반 <Still Unforgettable>(2008)으로 그래미를 수상하며 정상에 오른 그는, 2009년 신장이식 수술을 한 이후 C형 간염 합병증으로 건강이 나빠졌고, 2015년의 마지막 날 심부전증으로 인해 병원에서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나탈리 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