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생각이 없다.” 그림 임진아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임진아의 만화를 보면 모두 이런 생각을 할 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내 이야기, 저것도 내 이야기라고.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한다. 사소해서 잊고 있던 순간들을 포착하고, 몹시 정확하게 풀어낸 덕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과 그림들은 작가 자신에게 내뱉는 고백이기도 하다. “집에 가기 싫다”, “하기 싫은 일은 오전에 해요” 같은 말은 가히 작가의 고백이자 다짐이다. 여기에 누구나 좋아할 귀여운 그림까지 얹어내니 흔히 말하듯 작가의 일상이 예술이 되고, 나아가 작가와 독자의 경험은 기분 좋게 섞인다.

▲ (왼쪽부터) 29CM 앱 초이스매거진 연재 만화 <나를 선택하는 방법> 중 ‘하루는 1교시와 2교시’, 아름다운재단 주거지원캠페인 <집에 가고 싶다> 소책자
▲ 29CM 앱 초이스매거진 연재 만화 <나를 선택하는 방법> 중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
▲ SK 아트센터나비 코모 기획 전시 ‘내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영상 전시(2015)

임진아 작가가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일상 속 여유다. 하기 싫은 일을 미리 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도 결국엔 여유를 얻기 위한 행동들이다. 이처럼 사소하지만 소중한 여유를 세밀하게 포착하는 능력을 지닌 작가이기에 당연히 스스로 여유를 찾는 방법에도 아주 능통할 터. 그 방법을 두고 작가는 자신이 “나에게 관대한 사람이어서”라는 겸손한 이유를 대며 이렇게 우리에게 여유를 갖는 귀여운 방법을 하나 더 알려주고 말았다. 자, 모두 작가처럼 관객이 되어 작가의 취향이 듬뿍 담긴 영상을 관람해보자. 그리하여 경험할 여유로움이야말로 임진아 작가의 소박한 그림처럼 우리 일상에 꼭 필요한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Imjina Says,

“거의 매일 작업실에 출근해 하루하루 다른 비율로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한다. 나의 작업실은 내 방보다 좋아 그만큼 작업이 잘 되며 또 그만큼 노래를 듣거나 보기에도 집중이 잘 된다. 나는 나에게 관대한 사람이어서 1시간을 작업에 몰두했다면 그만큼 쉬고 싶어하고, 쉬게 한다. 그런 순간이면 자세를 고쳐 앉고, 일명 ‘한 명의 관객이 되는 놀이’를 시작한다. 유튜브에 친절하게 올라와 있는 라이브 영상들을 전체 화면으로 틀어 놓고 관람하는 것이다. 종종 도쿄와 서울에서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챙겨 보며 생을 연명하고 있는데 이 놀이도 그 흐름 중 하나이다. 노래가 끝나고 영상이 끝나려 하면 조용히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낸다.”

 

1. 에머슨 키타무라(エマーソン北村) ‘로큰롤의 시작은(ロックンロールのはじまりは)’ 앨범 발매 공연

같이 손뼉 칠 여유도 없이 시작하는 이 영상은 에머슨 키타무라의 앨범 <로큰롤의 시작은>에 수록된 곡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앉아 있는 관객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맨 앞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따금씩 움직이는 스태프의 모습과 오른편 부스에 자잘하게 붙은 스티커들은 공연을 보며 한 눈 팔기 좋은 것들이다. 그릇에 닿는 포크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분명 이 곳은 공연을 겸하는 카페임을 예상할 수 있다. 왠지 ‘오늘의 플레이트’ 같은 메뉴가 있을 것 같고, 여행자인 내가 여기 있다면 병맥주 하나만 시켰을 것 같다.

 

2. 보이는 라디오 ‘오슈(王舟) 편’

일본 라디오 채널 <제이웨이브(J-WAVE)> ‘헬로월드(HELLO WORLD)’에서 진행하는 스튜디오 라이브 오슈 편. 오슈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이상하게 이 스튜디오 라이브에서 부르는 노래를 더 즐겨 듣는다. 여름 감기 조심하라는 다정한 멘트 후 7분 50초에 시작하는 ‘옥수수밭(とうもろこし畑)’이라는 곡은 확실히 레코딩 버전보다 좋다. 사실 이 곡 하나만 듣기 위해서도 자주 보고 있다. 노래를 부르는 오슈의 얼굴과 기타치는 손, 도쿄 야경이 한 클립에 겹치는 순간은 마치 아주 이상한 뮤직비디오의 일부 같기도 하다. 총 네 곡을 부르는데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딱히 편집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라디오의 현장감을 꽤나 충실히 느낄 수 있다. 덤으로 노래가 끝난 후 디제이의 사연 소개까지.

 

3. 퍼퓸(Perfume) ‘Spice’ 공연 (Front Angle ver.)

퍼퓸 언니들은(언니 아님) 나에게 힘을 준다. 그 힘은 삼인조 그룹이라는 점에서 온다. 멤버가 많은 그룹이라면 다른 멤버의 파트에서 어느 정도는 애쓰지 않아도 될 테지만, 멤버가 3명인 그룹에게는 그런 순간이 거의 없다. 노래를 하고 뒤로 돌아 들어가는 순간이라든지 다른 멤버의 퍼포먼스 중 앉아 있는 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퍼퓸의 세 멤버는 마치 한 명이 부르듯이 한 곡을 충실하게 채운다. 하나의 진짜와 하나의 거울과 또 하나의 시간 차이로 이루어진 세 명의 안무. 이렇게 조금씩 다른 안무를 실시간으로 맞추는 걸 보면 왠지 뜨거워진다. 정면에서 이 안무를 보는 기분은 손 들고 환호하는 팬들의 땀내마저 느껴지듯 꽤 생생하다. 간주 부분에 비트매니아 게임에서 나올 것 같은 템포까지 너무나 완벽.

 

4. 시바타 사토코(柴田聡子) ‘카프 팬의 아이’(カープファンの子) 온천 연회장 라이브

이 영상을 보고 운 적이 있다. 나는 원래 어릴 때부터 반장선거 연설만 들어도 울고 싶었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나에게 이 라이브는 너무나 기묘하고 대단하다. 사람들이 가득 찬 연회장에서 자신의 노래에 취해 감정을 쥐어짜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시바타 사토코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학교 수련회 분위기가 나는 온천 연회장 라이브에는 그다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맨 앞에 앉아 노래에 맞춰 박수를 짝짝 치는 사람들처럼 화면 앞에서 나도 같이 짝짝 칠 뿐이다.

 

5. 랜턴퍼레이드(ランタンパレード) 2013년에 부른 라이브

랜턴퍼레이드를 좋아한 이후에 너무 많이 봐 버린 라이브 영상이다. 베스트 앨범에 실린 곡 중 '회송열차가 간다(回送列車が行く)’와 '코오슈우카이도는 벌써 여름이야(甲州街道はもう夏なのさ)’ 를 부르는데, 이 ‘두 곡’을 ‘연달아’ 부른다. 게다가 ‘좁은 술집에서 이 두 곡을 연달아 부른다’는 사실이 더해져 어느덧 이 영상은 어떤 꿈처럼 돼 버렸다. 그리고 1년 전 “모처럼 4명이 연주합니다”라는 라이브 공지를 보고 홀로 비행기를 타고 보러 갔다. 영상의 라이브가 진짜가 된 순간이었지만, 그저 컴퓨터 앞에 있는 것처럼 잠잠하게 바라보며 음소거한 입으로 계속 따라 불렀다.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는?

작은 독립 출판사 ‘우주만화’를 운영한다. 주로 퍼져 있는 생각과 취향을 글과 그림으로 엮어 작은 책으로 만든다. 작업한 책으로는 <도시 건강 도감>, <야간 채집>, <현명한 사람>, <어제 들은 말>, <여행 기록 연습>, <저녁 새벽> 등이 있다. 특히 일본 음악과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정서를 좋아한다. 웹진 <무구>에서는 일본 뮤지션 노래들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이 노래의 자초지종>을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패션 편집숍 29CM의 모바일 앱 매거진에서 ‘매일 귀여운 정도로 건강하게 살기 위한 이상한 지침서’인 <나를 위한 선택>을 연재했다. 작가의 다양한 작품은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홈페이지 imyang.net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imjina

우주만화 홈페이지 cosmic-comics.com

 

(메인이미지 출처- 임진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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