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사회는 유례없는 갈등을 겪는 중이다. 뉴스에선 연일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하는 사건을 보도한다. 첨예한 대립으로 들끓는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리포터는 군중의 격렬함을 비춘다.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댄 난 리모컨을 더듬어 채널을 돌린다. 누군가에겐 절실한 사건이 남 일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건 사회 현안에 관한 관심은 많아졌지만, 이를 심도 있게 접할 수 있는 접점은 점점 더 느슨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 뉴스엔 겉핥기식 보도가 넘쳐나고, SNS엔 선동 조 보도가 횡횡한다. 무엇보다 긴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이 드물어 문제를 복합적으로 보지 못하고 편협하기 쉬운 환경에 놓인다. 이런 비슷한 고민을 겪은 이들이라면 서점 곳곳에 자리한 학자의 저술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사회를 진단하는 데 있어 학자 특유의 이론적 탄탄함을 바탕으로 문제의 맥락을 짚는다. 무엇보다 이들은 흥미롭고 매력적인 필치를 가져 사회 이슈의 문턱을 낮추는 데 이바지한다. 지금 소개하려는 책은 한국 사회 저류에 흐르는 문제를 독특한 시각으로 다뤄 큰 인기를 끈 대표적인 학자들의 저서다.

* 본 게시글은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대 게임>(2018)

전상진 작가는 <음모론의 시대>를 집필했으며, 요즘도 여러 매체에서 왕성하게 목소리를 내는 핫한 학자다. 특히 시대 현상을 사회학으로 진단하는 데 능통하다. <세대 게임>에서는 수많은 사회 갈등이 '세대론'으로 해석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최근 몇 해 동안 인터넷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린 단어엔 꼰대, 갑질처럼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단어가 즐비하다. 눈을 광장으로 돌리면 요즘 세태를 개탄하는 노인들의 불만이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다. 저개발의 시대를 버텨낸 자신들의 기여를 부정하고 변화만 추구하기 바쁜 청년 세대를 못마땅해한다. 신구세대의 갈등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님에도, 최근 들어 더 도드라지는 건 왜일까. 전상진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세대 간 불화를 조장하는 세력을 지목한다.

복잡한 문제도 세대라는 틀로 끼워 맞추면 양상은 단순해진다. 모든 사항을 세대 간 제로섬 게임으로 모는 탓에 갈등의 골만 깊어진다. 한 세대가 이익을 독점해 나머지가 피해를 본다는 식으로 도식화한다. 그렇게 대결 구도를 만들면 세대 간의 마찰음은 한결 드세어진다. 구도가 단순해지면 사고는 얕아지고, 순전히 혐오를 표출하기 위한 날 선 말이 오간다. 대표적인 예가 기성세대가 고액 연금을 독점해 청년 세대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논리다. 손쉽게 인과를 만들고 상황을 끼워 맞추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데이터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게 실컷 싸움을 붙이고 나면 낙후한 시스템을 손보자는 논의는 뒤로 밀려난다.

세대 게임이 유효한 까닭은 대중의 기호도 한몫한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다양한 세대가 도시에 밀집하자 이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특정 세대를 대변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입장을 대변하며 세를 넓힌다. 언론이 머리기사에 자극적인 문구를 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대중은 복잡한 맥락보다는 한눈에 들어오는 강렬한 어휘에 반응한다. 그 결과 세대라는 용어는 사회 문제를 설명하는 만능키처럼 쓰이고 있다. 선동과 일갈이 들끓는 SNS엔 분열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본디 단언하는 글에는 허점이 있게 마련이고, 미묘한 맥락을 외면할 때 사위는 어두워진다. 전상진은 세대라는 프레임에 스스로 갇힌 게으른 대중에 칼끝을 겨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2017)

작가 김승섭의 글은 단정하다. <살인의 추억>에서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하거든요, 라는 말을 버릇처럼 되뇌던 형사 서태윤처럼 논거를 바탕으로 한 저술이다. 김승섭은 사회 역학자라는 직함처럼 수치 뒤에 숨겨진 아픔을 발굴한다. 차트와 표를 그려 넣어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한 논거를 편다. 그가 숫자와 씨름해서 다다른 타인의 고통은 엄연하다. 질병의 사회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구조를 바꿔 한국인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안에 착안해 도달 가능한 해법을 제시한다. 눈의 비늘을 벗겨주는 통찰에 기대지 않고 서류에 파묻힌 상처를 매만진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가정 먼저 병에 대해 말한다.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구조할 수 있는 이들에 초점을 맞춘다. 맞벌이 부모와 극심한 빈부격차가 방치한 아이들이 대표적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가 골치를 썩인 이슈도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했다. 신의 섭리에 의구심을 자아내는 사건이 도시를 잠식한다. 김승섭은 소재가 주는 무게에 굴하지 않고 결여된 사회의식을 끄집어낸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을 멀리하는 탓에 신뢰가 가고, 실제 조사 결과와 언론 기사를 중심으로 사회 시선이 얼마나 인간에게 동떨어져 있는지 개탄한다.

김승섭에 따르면 구직 과정에서 차별 경험이 있었냐는 질문에 차별이 있었다고 대답한 여성보다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한 사람의 건강이 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이들이 더 어렵고 예민한 환경에 서 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한결같이 수치 바깥에 가닿으려는 작가의 태도엔 묘한 감동이 느껴진다. 딱딱한 연구실과 세상과 동떨어져 보이는 서류를 매만지는 학자의 기존 이미지와 달라 느껴지는 신선함이다.

학자 출신 작가는 종종 대중을 간과한 글을 쓴다. 스토리텔링을 등한시하고 문장을 다듬지 않아 어렵다. 김승섭은 전문가의 식견과 단아한 문장을 겸비한 부러운 사람이다. 좀 안다고 젠체하지 않고 겸손하다. 어떤 분야든 일정 수준에 다다른 사람은 핵심에 가닿기 마련이다. 본질을 꿰뚫어 어렵거나 장황하지 않다. 김승섭은 현대 보건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유려하게 적시한다.

 

<모멸감>(2014)

영화 <기생충>에서 비극의 단초가 된 건 바로 냄새다. 이 냄새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멸시하는 제스처가 숨어있다.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는 얼굴과 민감한 촉수를 지닌 상대의 소스라침이 객석을 전율케 한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선을 그을 때 인간은 모멸한다. 그 느낌은 의식하지 못한 새 뇌리를 파고든다.

다수 인문서를 쓴 사회학자 김찬호는 자신의 저서 <모멸감>에서 한국인이 누군가와 복닥거릴 때 필연처럼 떠안게 되는 감정을 서술한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 기저에 자리한 모멸을 훑는다. 의식하고 있지만, 말로 정의하지 못한 감정이랄까. 책을 읽고 나면 자기 모멸이란 사회가 내재한 기본값임을 깨닫게 된다. 습관처럼 타인을 마주할 때 판단을 가미하고, 남 눈치를 보느라 원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건 본능적으로 집단에서 배제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모멸은 나를 밖으로 밀어낼 때 발생하고, 이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한국에서 모멸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저자는 학자답게 지적 사유가 모멸에서 탈피할 수 있는 열쇠라 말한다. 성숙한 사회, 부정적 감정을 정화하는 시스템 말이다. 가령 젠더와 페미니즘으로 인간의 역치를 살피는 연장 선상에 모욕 감수성이 자리한다. 모욕 감수성은 교육과 사회 공동체 의식 개선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이처럼 뜬구름 잡지 않는 김찬호의 선량함과 과단성은 <모멸감>의 힘이다. 단호한 문장으로 일상을 곡해하는 부정적 현상을 풀어낸다.

인정 투쟁의 사회에선 남보다 앞서는 걸 우월로 착각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걸 우선한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모멸의 풍토에 대해 저마다의 책임을 지적한다. 스스로 존엄을 잃은 개개인이 이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 전체가 모멸에 저항하는 태도를 갖춰 모두를 존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김찬호는 타인을 적이 아닌 궁극적으로 고통을 분담하는 공동체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적어도 살의는 억제할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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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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