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런던이나 도쿄, 파리, 북경처럼 그저 어느 나라의 수도일 뿐인데 참으로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정치적으로 읽히기도 하고 아픈 역사를 떠올리기도 한다.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를 연상하기도 하고 굶주린 사람들의 모습도 생각난다. 하지만 평양 역시 다른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로 정의될 수 없다. 서울이 서울을 경험한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모두 다 다른 서울이듯 평양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자유롭게 평양을 오갈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 느낀 서로 다른 평양을 소개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평양과 우리가 모르고 있던 평양 그사이 어딘가를 여행하는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디어 평양>

양영희 감독에게 평양은 가족이 있는 곳이다. 1970년대, 양영희 감독의 세 오빠는 ‘북한’으로 보내졌다. 재일교포 귀국사업의 일환이었다.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던 당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조국’은 지상낙원처럼 여겨졌다. 곧 통일이 되고 온 가족이 모여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양영희 감독 아버지의 신념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 모든 기대와 신념을 외면했다. 세 오빠는 다시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영양실조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양영희 감독은 궁금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세 아들을 ‘조국’으로 보낸 그 선택을 과연 후회하는지. 그렇게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평생을 원망하고 맞서온 아버지의 속내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디어 평양>에는 ‘수령님’과 ‘장군님’에게 충성을 다하는 아버지와 북에 있는 아들에게 손난로부터 학용품까지 온갖 물자를 보내는 어머니 그리고 평양에 사는 세 오빠의 10년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온 가족이 모여 생일파티를 하고, 조카의 재롱을 보고, 식사를 하는 그 공간이 평양이라는 사실만 빼면 오래전 찍어놓은 우리 가족의 홈비디오를 틀어서 보는 느낌과 다를 게 없다. 그만큼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조총련 간부인 아버지는 공식 석상에서는 양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연설을 하지만 양영희 감독이 들이미는 카메라 앞에서는 런닝만 입고 딸과 장난을 친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내밀한 이야기가 툭 하고 나온다. “오빠들을 평양에 보낸 거 후회하지 않아?”라고 묻는 딸에게 “벌써 가버린 거 할 수 없지. 만일 안 보냈으면 더 좋았겠지만.”하고 3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속마음을 말한 것처럼 말이다.

양영희 감독은 ‘디어 평양’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제게 평양은 정치적 상징도 무엇도 아닌 그저 사랑하는 가족이 사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디어’(dear, 친애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평양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가족들에 대한 존경을 표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디어 평양> 속 평양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가족이 사는 그곳, 고향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뇌경색으로 마비가 온 아버지에게 “얼른 나아서 평양에 갑시다” 할 때는 더없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모두 그 ‘평양’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리라. 우리 모두에게 양영희 감독의 ‘평양’과도 같은 곳이 한 곳쯤은 있을 테니까.

<디어 평양> 예고편

비극적인 역사를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평양’의 의미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디어 평양>이 2006년 베를린영화제 넷팩상과 미국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걸 보면 말이다.

 

<굿바이, 평양>

<굿바이 평양>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굿바이 평양>에서의 ‘평양’은 양영희 감독의 조카 선화가 자라는 공간이라는 거다. 학교에선 혁명과 주체사상에 대해 배우고, 학교 밖을 나서면 비틀즈를 듣고 연극을 보러 다녔던 양영희 감독. 그런 자신의 분신이라 규정한 조카 선화. 선화는 비록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 있는 할머니가 보내주는 일제 생필품에 의존해 살아간다. 선화의 삶과 양영희 감독의 삶이 이처럼 묘하게 겹쳐진다. 양영희 감독이 ‘제주도에서 건너온 이민 2세’라면, 선화는 ‘오사카에서 건너온 이민 2세’인 셈. 양영희 감독은 그렇기에 선화의 성장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문 제목도 <선화, 또 하나의 나(Sona, Another Myself)>.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등장한 6살 꼬마 선화는 영화가 끝날 무렵 훌쩍 커서 10대 후반의 사춘기 소녀가 되어있다.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영화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평양에 아는 사람 하나쯤 생긴 느낌이 든다. 아마도 고모의 눈으로 선화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선화의 성장은 그 어떤 사상이나 정치 이념도 뛰어넘는다. 평양은 어느새 선화가 사는 곳이 된다. 뉴스에서만 보던 평양과는 다르게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양영희 감독, 사진 출처 – 부산일보 

안타까운 것은 양영희 감독이 <디어 평양>으로 인해 북한 당국으로부터 입국 금지조치를 받아 다시는 선화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영희 감독은 그럼에도 영화는 계속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선화가 고모랑 영화제를 따라다니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닐 그 날을 고대하면서. 관객으로서도 언젠가 실제로 선화를 만날 날을 기대해본다. 잘 아는 사람 같아 인사라도 건네고 싶지만 차마 아는 척은 못 하겠지.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굿바이, 평양> 예고편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시드니에 사는 안나 브로이스키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딸이 매일같이 뛰어노는 시드니 파크에서 탄층 가스 시추를 하기로 했다는 것. 지역 주민들과 함께 집회도 해보고 시위에도 나갔지만 거대 다국적 기업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안나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분야로 이 문제에 맞서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화를 만드는 것. 2007년 <포비든 라이즈>라는 다큐멘터리로 나름 흥행감독 자리에 올랐던 그였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수많은 환경 다큐멘터리들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 또한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안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김정일이 1987년 쓴 <영화와 연출>이라는 책. 몇 해 전 평양에 다녀온 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책이었다.

김정일이 제시하는 완벽한 선전영화를 만들기 위한 원칙들과 책 곳곳에 담긴 자본주의 타파의 메시지가 안나를 사로잡았다. 돈에 눈이 멀어 환경을 파괴하는 거대 기업들이야말로 김정일의 선전영화에서 등장하는 사악한 적의 모습이었던 것. 안나는 김정일의 영화 교본을 토대로 선전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본고장인 평양에서 직접 배워와서 말이다. 다행히도 주한 호주 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적 한국에 잠시 살았던 안나에게 한국은 그리 먼 나라가 아니었다. 물론 북한은 조금 다른 얘기였지만.
호주에는 북한 대사관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국가의 북한 대사관에 서신을 보냈다. 역시나 답은 없었다. 그나마 답을 보내온 건 주스페인 북한 대사관. 7만 유로를 요구했다. 없는 예산에 어렵게 찍게 된 영화 아니었던가. 당연히 그만한 돈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20년간 관광회사를 운영해 북한에 자주 드나들었던 사업가를 만났다. 다행히도 그는 김정일의 영화 교본으로 선전영화를 찍고 싶다는 아이디어에 ‘너무 신선하다’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 여러 차례 북한 측 관계자와 인터뷰도 가졌다. 안나는 북한 영화를 배우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구 영화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 영화 산업 전반에 관한 촬영허가를 받았다. 2년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결실이었다. 그렇게 안나는 2012년 9월, 평양으로 향했다.

안나에게 평양의 첫인상은 ‘디즈니랜드’였다. 평양 곳곳에 자리 잡은 선전 문구들의 내용을 읽을 수 없었기에 그 문구조차 파스텔톤의 그림처럼 느껴졌단다. 도시 전체가 마치 “1950년대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도 했다. 첫인상만 좋았던 건 아니었다. 안나를 향한 북한의 대접 또한 남달랐다. 북한 영화계의 원로 박정주 감독을 비롯해, ‘북한의 올리버 스톤’이라 불리는 리관암 감독, 김정일이 가장 아꼈다는 국민배우 윤수경과 리경희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안나의 영화를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 최고의 작곡가인 배용삼 작곡가는 심지어 안나의 영화를 위해 곡까지 만들어 선물했다. 특히 안나의 영화를 위해 성심성의껏 조언을 해주었던 박정주 감독과는 정이 많이 들어 헤어질 때 부둥켜 울기까지 했다.

물론, 마냥 자유롭진 않았다. 정부 관계자가 늘 촬영 현장을 감시했고, 카메라 앵글은 언제나 통제됐다. 김정일 일가와 관련된 장면은 초점을 확실히 맞춰 찍어야 한다거나 군인은 촬영해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규칙 또한 안나를 따라다녔다. 북한을 떠날 땐 촬영본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드디스크를 훑어본 뒤 평양을 담은 와이드샷에 나오는 군인들을 삭제하라는 요청이 있긴 했지만 북한 측 담당자가 막아주어 다행히 그 장면은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러한 제약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안나의 영화를 자기 영화처럼 응원해주고 안나가 제기하는 시드니의 환경 문제를 자기 일처럼 공감해주는 북한의 영화인들이 눈에 띈다. 전쟁 준비만 일삼는 괴물이 살 것 같았던 그곳에 우리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깨달음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안나와 함께 평양냉면도 먹고 소주도 마시며 영화 얘기로 하나 되는 모습은 체제와 사상을 떠나 같은 영화인으로서의 공감대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예술의 힘이란 이처럼 신비롭다는 것도. 물론 이 모든 건 북한 영화인들에 대해 예의와 존중을 잊지 않았던 안나의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안나의 단편 영화 <정원사(Gardener)>는 영화 끝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자연을 활용한 은유, 신념이 강한 노동자계급의 여주인공, 사악한 자본주의 악당과의 결투, 다 함께 노래 부르기 등 북한영화의 요소들이 곳곳에 잘 녹아 있다. 배용삼 작곡가의 곡 또한 웅장하게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물론, 이 영화 하나로 호주 전체에 진행 중인 탄층가스개발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드니 파크의 탄층 가스 시추만큼은 막아낼 수 있었다. 민중이 힘을 합치면 강한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북한 영화의 교훈이 나름 그 효과가 있었던 셈. 물론 그 강한 적에 그들을 억압하는 독재자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현실은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말이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예고편

 

Peso and Pacman ‘Escape to North Korea’ MV

Peso와 Pacman, 출처 – Kick starter 

2014년 8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 특이한 프로젝트가 하나 올라온다. 제목은 ‘북한에서 뮤직비디오 찍기’. Peso와 Pacman이라는 두 명의 신인 래퍼가 북한에서 뮤직비디오를 찍기로 했으며 이를 위한 여행경비와 제작비로 6천 달러를 모금한다는 내용이었다. 래퍼와 뮤직비디오와 북한이라니. 이 괴상한 조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심지어 이 신인 래퍼 두 명은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을뿐더러 자신들이 평생 살아온 동네를 벗어나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북한이라니. 그것도 평양 한가운데에서 뮤직비디오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야기는 투자은행에 다니는 25살의 램지 아부든(Ramsey Aburdene)과 팩맨(Pacman)이 워싱턴 DC의 한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Peso와 Pacman이 Ramsey Aburdene의 집이자 녹음실에서 작업하는 모습. 출처 – Washington post 

투자은행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사실 램지 아부든의 오랜 꿈은 랩 음악을 위한 작은 스튜디오를 만드는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램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연립주택에서 포레스트 힐스 텐리타운 뮤직 그룹(The Forest Hills Tenleytown Music Group)을 시작한다. 녹음실은 자신의 드레스룸. 셔츠들 사이에 마이크가 달려있을 정도로 조악했다. 그렇게 자신의 꿈을 위해 작게나마 녹음실도 만들고 음악 하는 스텝들도 꾸리던 램지는 Congress Heights의 공원에서 동영상을 찍다가 우연히 팩맨을 만난다. 당시 팩맨은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팩맨의 프리스타일 랩 실력을 익히 아는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램지에게 랩을 선보이게 된다. 그 실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램지는 팩맨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기에 이른다.

래퍼 Pacman, 출처 – Washington post

워싱턴 DC의 대표적인 빈민가 Congress Heights 출신인 팩맨은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와 감옥에 간 형,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가구조차 없는 텅 빈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팩맨의 19년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늘 굶주렸으며, 총알을 피해 다니기 바빴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크고 작은 범죄에 연루되어 학업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이렇다 할 일자리도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에게 램지의 제안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었다.

비슷한 처지인 팩맨의 친구 페소(Peso)까지 합류하자 램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재능있는 신인 래퍼를 어떻게 세상에 알릴 것인가. 그때, 램지는 자신의 친구 마이클 바셋(Michael Bassett)을 떠올렸다. 북한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전문가인 마이클 바셋. 군인이었던 마이클은 4년 동안 DMZ에 근무를 하면서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이후 문화 외교를 통해 한반도의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으며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북한을 4차례나 방문한 이력도 가지고 있었다. 램지는 바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북한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자!’

이렇듯 페소와 팩맨, 램지 모두 북한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신인 래퍼들을 홍보할 기회가 필요했고 마침 그것이 북한이었던 것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가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여러 인터뷰에서 북한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은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팩맨은 “북한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무엇이 진짜인지 보고 싶다”고 말했다. 페소 역시 “위험하다면 내가 사는 이 지역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되묻는다. 가본 적 없는 사람들에 의해 위험하다는 평판을 받는 건 자신들이나 북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듯 이제 막 스무 살 밖에 안된 래퍼들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과연 북한이 그들이 살던 곳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인가.’라며.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 여행은 의미가 생긴다. 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The They say it’s dangerous, well my streets be a hellzone (그들은 위험하다고 말하지. 근데, 내가 살던 거리는 지옥의 구역이야)” 라는 가사에 녹아들어 있다.

사진 출처 – Dopamine36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한 북한 여행은 순조로웠다. 평양에서 팩맨과 페소는 매일 관광버스에 올랐고, 정부가 승인한 관광가이드와 함께 정부가 승인한 장소만을 다녔다.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작은 캐논 카메라로 몰래몰래 조금씩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이런 지경이니 마이크나 헤드폰 같은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음악 없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랩을 해야 했다. 게다가 여행을 했던 당시 11월의 평양은 영하의 온도에 눈까지 내렸다. 건물들 중 어느 곳에서도 난방은 되지 않았고, 뮤직비디오 때문에 입고 있던 실크 정장은 추위에 무방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팩맨과 페소에게 평양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 그들에게 코트를 빌려준 북한 사람 덕분이었다.

‘Escape to North Korea’ MV

뮤직비디오에는 평양의 지하철, DMZ, 금수산태양궁전은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의 화려한 묘지가 모두 등장한다. 뉴스 화면으로만 보던 평양의 유명장소에 흑인 래퍼 두 명이 랩을 하는 광경은 이질적이다. 흡사 세트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자신이 사는 곳만큼 위험하겠냐는 그들의 질문을 떠올려보면 평양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평양과 평화. 생각해본 적 없던 조합이다. 평양과 래퍼만큼이나 말이다.

사진 출처 – America CGTN

뮤직비디오는 성공적이었다. 베이징에서 작은 사고를 겪은 것 이외에는 모든 스텝이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왔고, 2014년 1월 김정은 위원장의 생일날, 공식적으로 공개된 뮤직비디오는 반향을 일으켰다. 가디언지는 물론 워싱턴포스트, 블룸버그 등의 매체들이 페소와 팩맨을, 그리고 이 이질적인 뮤직비디오를 주목했다. 램지의 예상은 적중했다. 북한에서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는 모험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실제 가사의 내용처럼 북한에서 무사히 돌아온 페소가 뮤직비디오를 찍은 지 3년 후 워싱턴에서 총에 맞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영화 <타이타닉>의 대사가 떠오른다. “3년 동안 오직 보물과 타이타닉만 생각했는데 내가 잊고 있었어요.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뉴스에서만 보던 그곳에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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