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인물들은 차를 내려 마신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정갈한 자세와 마음으로. 그 모습은 마치 일상과 삶을 대하는 태도처럼 느껴져 마음이 차분해진다. 영화 <일일시호일>과 <경주>에 담긴 차 이야기.

 

<일일시호일>

스무살의 ‘노리코’(쿠로키 하루)는 아직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했다. 취향과 꿈이 확고한 사촌 ‘미치코’(타베 미카코)와 자신을 비교하며 종종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엄마의 권유로 미치코와 함께 다도 수업을 받게 되고,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미는 다도를 통해 점차 자신을 찾아간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전 회차 매진을 기록한 화제작으로, 모리시타 노리코의 다도 에세이 <매일매일 좋은 날>을 영화화했다. 원작 에세이는 저자인 자신이 25년 동안 다도를 배우며 깨달은 이야기를 담았는데, 영화는 그 긴 세월을 ‘지루하리만큼’ 느린 템포로, 착실히 스크린에 옮겨낸다.

처음에 노리코는 다도를 배우라는 엄마의 말에 시큰둥해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동작과 엄격한 규칙들로 가득한 다도에 불만도 싹튼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규칙을 머리로 되뇌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면서 노리코는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우연히 시작한 다도가 일상에 스며들면서, 그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영화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차 한잔을 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이 깃드는지 잘 보여준다. 걸음걸이, 자리에 앉는 위치와 방향, 찻잔을 쥐는 손의 모양…. 익혀야 할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다도 수업은 무려 24년 동안 지속되지만, 노리코가 배우는 건 다도 그 이상의 삶을 대하는 태도다. 이는 변화하는 계절과 반복되는 일상을 음미하고 인생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는 일과도 같다.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에 휩싸여 있던 스무살의 노리코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거나 방황하지 않으며 삶을 초연하게 바라본다. 이러한 노리코의 성장을 만들어낸 것은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과 그 시간 사이에서 원형으로 순환하는 계절, 그리고 그 계절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 다도였다. 깨끗한 마스크와 단아한 분위기를 지닌 쿠로키 하루가 인물을 분석하는 세밀한 연기력으로 ‘노리코’의 방황과 성장을 섬세하게 짚어냈다.

<일일시호일> 예고편

 

<경주>

친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베이징대학 교수 ‘최현’(박해일)은 7년 전 경주의 찻집에서 봤던 춘화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간다. 한편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는 없어진 춘화를 찾는 최현이 의심스러우면서도 그에게 묘한 호기심을 느낀다. 오가는 대화 끝에 최현은 윤희의 저녁 약속에 동행하게 되고, 그들은 예상치 못한 밤을 맞는다. 해외 유수 영화제를 석권한 시네아스트 장률 감독의 작품으로, 고분능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잡은 경주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 꿈과 현실의 흐릿한 경계를 다뤘다.

영화에는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과 새로운 인연, 그리고 만남들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경주 시내의 아름다운 밤 풍경, 보문호수, 고분능 등 고즈넉한 매력을 지닌 장소들은 그러한 만남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영화 속 주 배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찻집 ‘아리솔’은 전반부 내내 등장하며 영화의 아련한 정서를 극대화한다. 예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통 찻집, 낮은 톤으로 흐르는 대화, 천천히 음미하는 차 한잔은 느릿하고도 차분한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며 짙은 여운을 남긴다. 신민아는 비중 있는 다도 신을 유연하게 소화했는데, 촬영 전 장률 감독으로부터 선생님을 소개받아 다도를 따로 배웠다고 한다. 여백을 메꾸는 섬세한 디테일, 다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된 장면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차를 음미하는 듯한 감각마저 안긴다.

<경주>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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