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자유다’. 이 한 마디가 한국 힙합 신에 남긴 영향은 상당하다. 발언의 정확한 출처를 알 순 없지만, ‘90년대 중반 즈음 교포 출신 래퍼들을 중심으로 대두했으며,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다. 지금도 ‘자유’는 힙합을 정의, 혹은 대변하는 핵심 키워드로 통용된다. 당장 포털 사이트에 ‘힙합은 자유다.’를 검색해보시라. 관련 발언이 담긴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티스트, 기자, 블로거, 대중 할 것 없이 한결같다.

부기 다운 프로덕션 via fanart.tv

처음엔 힙합이란 문화, 더 적확하게는 힙합 아티스트들에게서 느껴지는 자유분방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 기준에서도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래퍼들의 옷차림과 언행이 힙합과 자유를 직결시키는 매개가 되었다. 염색 머리와 헐렁한 힙합 패션의 젊은 세대를 두고 혀를 차며 질타하는 기성세대에게 래퍼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은 “힙합은 자유예요!”로 맞섰다.
이후, 이 개념은 좀 더 좁아지고 구체적으로 된다. 음악적인 특징으로 한정한 것이다. 기존 가요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온갖 비속어와 비판적인 내용의 가사를 근거 삼아 힙합의 자유성을 더욱 부각했다. 혹자는 힙합에 내재한 가장 큰 정신 중 하나인 ‘저항’을 끌고 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노예제로 고통받았던 흑인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합합에 투영되었고, 그래서 힙합은 자유라는 얘기다.

이것이 과연 옳은 정의인가를 따지기에 앞서, 적어도 월드 와이드 웹(WWW) 시대 이전에 한국에서 힙합을 설명하는 데에는 꽤 효과적이었다. TV나 라디오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국외 음악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데다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마저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힙합의 특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여전히 ‘힙합은 자유’라고 외친다면, 곤란하다. 너무나도 모호하여 오해의 소지가 많고, 실제로 힙합의 탄생 이래 통용되어온 정의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작 힙합은 비흑인, 혹은 흑인 문화권 외의 래퍼들에게 매우 폐쇄적이고 구속적인 장르다.

유색인종들의 집결지, 사우스 브롱크스의 거리 via NY Times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몰려든 유색인종들의 집결지,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에서 탄생한 힙합은 인종차별을 비롯한 부당한 사회 시스템과 부대끼며 성장해왔다. 힙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저항과 남성성 같은 키워드가 이 과정에서 입력됐다. 그런데 이 둘보다 강하고 뿌리 깊은 것이 바로 ‘흑인(Black)으로서의 정체성’이다. 물론, 힙합이 나오기 전부터 블랙뮤직과 문화 컨텐츠 전반엔 흑인성(negritude)에 기반한 여러 특성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힙합에서 이는 더욱 견고하며, 폐쇄적인 성향으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가 비흑인 래퍼와 게이 래퍼를 배척한 역사다. 힙합 역사 속엔 많은 비흑인 래퍼가 있었지만, 성공한 사례는 손꼽을 만큼 적다. 전통적으로 힙합 신에서의 성공은 비단 상업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흑인 래퍼를 포함한) 블랙 커뮤니티의 인정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비흑인 래퍼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백인과 라티노 래퍼들이 히트곡을 내고 인기를 끈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위대한 힙합 아티스트’로 회자되는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비스티 보이즈 via ew.com

물론, 비흑인 래퍼들의 실력과 스타일이 전반적으로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천 만장 신화를 썼던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의 랩은 딱 팬보이 수준이었고, 드물게 위대한 아티스트로 거론되는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도 순수하게 랩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특별하지 않았다. 실제로 랩-록(Rap-Rock)이라는 혁신적인 서브 장르의 인기를 주도한 당시 비스티 보이즈에 열광하던 이들 90% 이상이 백인, 그것도 힙합이 아닌 록 팬들이었다. 독보적인 랩 스타일과 사운드를 앞세운 싸이프레스 힐(Cypress Hill)과 하우스 오브 페인(House of Pain) 같은 그룹의 상황도 비슷했다. 이들이 힙합 신에서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건 전성기가 지나고도 한참 뒤부터다.

최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힙합 신에선 “너희는 흑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멸시와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힙합을 할 자격이 없어. 힙합은 우리(흑인)가 탄생시켰고, 우리에 의해서만 진정성을 부여받을 수 있어.”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히, 힙합 아티스트들의 주적이나 다름없는 백인이 랩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불쾌한 현상이었다.
실제로 빈민가의 흑인만큼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나온 백인 래퍼라 할지라도 백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자격 미달 요소였다. 이 같은 판단의 배경엔 힙합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거리에서의 명성(street cred)’을 획득했는지의 여부도 있었다. 서부 갱스터 래퍼의 계보에 있는 몇몇 라티노/멕시칸 래퍼들만이 그나마 흑인 래퍼와 교류하고 인정받았던 사례가 당대의 현실을 방증한다.

싸이프레스 힐 via Discog

이쯤에서 에미넴(Eminem)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백인 래퍼 배척이 한창 진행되던 ‘90년대 한복판에 등장하여 역사를 새로 쓴 래퍼. 모든 논란을 불식할 만큼 압도적인 랩 실력을 지닌 에미넴은 정말 드문 경우다. 그러나 에미넴의 정식 데뷔와 성공 뒤에 닥터 드레(Dr. Dre)의 거대한 영향력이 있었다는 점과 최초 많은 이가 에미넴의 랩을 듣고 당연히 흑인일 거로 여겼던 일화 등에서 그 역시 이상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에미넴 via Detroit Metro Times

그나마 백인 래퍼는 게이 래퍼들에 비하면, 대우가 나은 편이었다. 게이 래퍼들은 흑인임에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전자는 오랜 인종차별 역사와 그에 따른 흑인들의 지난한 삶, 그리고 그러한 환경에서 태어난 힙합의 특수성이 고려되어 충분히 당위성을 부여받았다. 힙합 안에서의 백인 래퍼 배척을 두고 ‘역인종차별’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후자는 ‘거리에서의 명성’과 남성성에 대한 집착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어 초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난 2017년, 래퍼 커먼(Common)이 했던 말처럼 ‘힙합은 항상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고,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 사회에서 자란 흑인에 국한되었다. 그 안에 비흑인과 게이 래퍼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힙합에서의 동성애 혐오와 관련한 내용은 다른 글을 통해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한, 에미넴의 성공 이후, 이전보다 많은 백인 래퍼가 등장하고 성과를 보였지만, 블랙 커뮤니티와 힙합 아티스트들이 세운 장벽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커먼 via Discog

이 외에도 힙합의 폐쇄성과 구속성을 엿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예는 많다. 2012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빌보드 랩 송 차트에 오르자, 힙합 라디오 프로의 디제이들이 비판을 퍼부었던 일화(‘힙합 아티스트가 아닌 이의 곡이 랩 송 차트에 올랐다.’), 비흑인 래퍼가 절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비속어와 출신에 따라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을 정해놨다는 점 등도 대표적이다.
부디 오해는 마시라. 그래서 힙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니까. 힙합이 음악이자 문화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성장하는 데는 이 같은 폐쇄성이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앞서 강조했듯이 극심한 인종 차별과 적자생존의 현실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흑인들의 역사와 현실이 있기에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싸이 via Discog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많은 래퍼와 장르 팬들은 ‘힙합은 자유다.’를 한국 힙합으로부터 야기된 논란에 대응하는 슬로건처럼 쓰고 있다. 사회적 약자 혐오 가사에 대한 비판에서도 마치 타노스의 건틀렛처럼 거의 무적에 가까운 논리로 작용한다. 하지만 힙합은 무조건적인 자유를 담보하는 음악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의 많은 힙합 아티스트도 권하듯이 힙합을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힙합에서 표현의 자유가 가장 빛을 발한 건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했을 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메인 이미지 영화 <8마일> 스틸컷 편집 이미지

 

Writer

리드머/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