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위태롭다. 가족의 비극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화를 그리고, 영향력 큰 친구와 지내면서 정작 자신의 꿈은 희미해져 가고, 자신이 근무하는 은행의 돈을 횡령한다. 그들을 보면 내게 같은 상황이 와도 저 선택을 피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부터 든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출처 - <양의 나무>(2017) 트위터 

사람이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아주 작은 돌파구가 보이면 그곳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이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을 시작으로 삶이 무너지더라도 말이다. 요시다 다이하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서서히 무너져가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내 삶은 지금 무너져요, 그런데 왜 아름답죠?

어떤 매혹적인 이유 때문에 무너져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요시다 다이하치의 영화를 살펴보자.

 

<사랑을 보여줘 바보야>

腑拔けども, 悲しみの愛を見せろ, Funuke, Show Some Love you Losers!|2007|출연 사토 에리코, 사츠카와 아이미, 나가사쿠 히로미, 나가세 마사토시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혼란스러운 ‘키요미’(사츠카와 아이미). 장례식을 기점으로 키요미는 언니 ‘스미카’(사토 에리코)와 함께 지내게 된다. 자매의 이복오빠인 ‘신지’(나가세 마사토시)는 스미카에게 늘 조심스럽다. 재능과 상관없이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스미카와 그런 언니에게서 영감을 얻어서 호러만화를 그리는 키요미의 불편한 동거는 예상보다 길어진다.

<사랑을 보여줘 바보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강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가족의 비극에서 영감을 얻어 호러만화를 그리는 키요미, 배우를 꿈꾸면서 자신의 재능 부족보단 늘 타인과 환경 탓을 하며 안하무인으로 사는 스미카, 어릴 적 약속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스미카에게 쩔쩔매는 신지까지. 신지의 아내 ‘마치코’(나가사쿠 히로미)는 가족 없이 자랐기에, 온종일 집안일만 해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한다.

<사랑을 보여줘 바보야> 트레일러

이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지는 사회에서, 지긋지긋한 애증으로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서로에게 의지가 된다. 키요미가 만화를 그리기 위해 가족이 필요하듯, 가족은 삶을 그려나가는 데 필수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미카와 키요미는 서로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사랑을 보여줘 바보야, 라고.

 

<퍼머넌트 노바라>

パーマネント野ばら, Pamamento Nobara|2010|출연 칸노 미호, 에구치 요스케, 이케와키 치즈루, 코야케 에이코

일본의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에 ‘퍼머넌트 노바라’라는 동네 유일의 미용실이 있다. 마을 여자들의 이야기가 꽃피는 미용실에는, 이혼 후 어린 딸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나오코’(칸노 미호)가 엄마와 함께 일하고 있다. 나오코의 어릴 적 친구인 ‘토모’(이케와키 치즈루)는 만나는 남자마다 폭력이나 도박 등 문제가 많고, ‘미짱’(코이케 에이코)은 바람 피우는 남편을 사랑하느라 마음고생이다. 나오코는 첫사랑이었던 ‘카지마’(에구치 요스케)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지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망설인다.

<퍼머넌트 노바라>의 배경인 미용실이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파마가 오래가기 때문이다. 미용실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사랑에 대해 말하며 파마를 한다. 이왕 시작했다면 오래 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파마나 사랑이나 비슷할 거다. 너무 독학 파마약 때문에 머리가 핑 돌 수도 있지만, 지속할 수 있다면 그 정도쯤은 견딜 수 있다. 아플 수 있음을 알고도 시작하는 사랑처럼 말이다.

<퍼머넌트 노바라> 트레일러

동네 친구인 나오코, 토모, 미짱은 각자 다른 방식의 사랑을 하지만 훈수 두기보다는 서로의 방식을 존중한다. 어떤 사랑을 택하고 아플지라도 그 선택을 비판하기보다 안아주고 위로해준다. 영화 중간에 “어떤 사랑도 없는 것보다 낫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미련해 보여도 나름의 사정으로 선택한 사랑이라면 응원해주는 게 옆에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일 거다. 독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꿈꾸고 응원받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테니까.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桐島、部活やめるってよ, The Kirishima Thing|2013|출연 카미키 류노스케, 하시모토 아이, 히가시데 마사히로, 마츠오카 마유

평화롭던 금요일 오후, 배구부 에이스인 키리시마가 배구부를 그만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학교 전체에서 주목하는 키리시마의 소식에 그의 애인, 친구, 배구부원들까지 많은 주변인이 혼란을 겪는다. 이들의 혼란은 점점 커져서 키리시마와 전혀 상관없는 영화부 ‘마에다’(카미키 류노스케)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마에다는 주변 기류와 상관없이 자신이 꿈꾸던 좀비 영화를 찍기 위해 노력한다.

키리시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영화는 키리시마가 부재한 이후의 주변 인물들을 다룬다. 늘 키리시마를 기다리던 친구들은 여전히 그를 기다리며 농구를 하고, 베구부 에이스인 키리시마가 사라지자 그의 자리에 대신 들어간 서브멤버는 책임감과 부담을 더 느낀다. 키리시마라는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 곁에서, 그 영향력 안에서 나름의 안정감을 누리던 인물들은 온전히 자신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트레일러

키리시마를 둘러싼 학교의 주류 인물들과 달리, 철저히 비주류 인물로 구성된 영화부 학생들은 키리시마의 영향력 밖에 있으므로 꿋꿋하게 자신들의 길을 간다. 거창한 꿈이나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다.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속 다양한 인물들 중 누가 옳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저 각각의 인물이 한 선택을 응원해주고 싶다. 그 어디를 향해 가더라도 지지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할 그들을 위해서.

 

<종이달>

紙の月, Pale Moon|2014|출연 미야자와 리에, 이케마츠 소스케, 고바야시 사토미, 이시바시 렌지

전업주부로 지내다 은행의 계약직 사원이 된 ‘리카’(미야자와 리에). 리카는 까다로운 고객인 ‘코조’(이시바시 렌지)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그의 손자인 ‘코타’(이케마츠 소스케)를 만난다. 리카와 코타는 서로에게 이끌리고 금세 연인이 된다. 리카는 코조와 대화하다가 코타가 큰 빚이 있음을 알게 되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다.

리카는 어느 고객에게 액세서리가 가짜지만 예쁘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자 고객은 가짜여도 예쁘면 좋지 않냐고 답한다. 리카는 돈이 많은 ‘진짜’가 되기를 원하며 횡령에 이르렀고, 소비에 대한 유혹이 왔을 때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인이 가장 빠르게 행복을 느끼는 법은 소비이고, 그 외에 방식으로 행복을 획득하는 법을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

<종이달> 트레일러

선한 동기일지라도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다. 리카는 횡령을 했고, 그 돈을 온전히 사치 부리는 데 사용했다. 리카는 코타에게 돈을 쓰면서 불안과 행복 중에 무엇을 더 크게 느꼈을까. 코타가 행복하니 괜찮다, 이 돈이 아니었으면 코타를 놓쳤을 거야, 와 같은 합리화를 마음 안에 달처럼 띄워놓고 지냈을 것만 같다. 한때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마음 안에 만들었던 수많은 종이달이 떠올랐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