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영화’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영화의 퀄리티가 낮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여기서 ‘B’는 완성도의 등급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다른 영화에 비해 작은 규모의 제작비를 뜻한다. 영화사 입장에서는 자본이 많이 투입되면 그만큼 감독에게 압박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비해 B급 영화는 예산이 적은 만큼 감독에게 주어지는 자유도가 높은 편이다.

최근 들어서는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영화에도 B급 영화스럽다고 표현하는 등, 과거 B급 영화의 스타일과 정서가 녹아든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다. 블록버스터급 예산으로 B급 영화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B급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감독들이 지금도 B급 영화의 정서를 계승해오고 있다.

B급 영화를 말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감독 중 한 명이 아벨 페라라다. 마틴 스콜세지와 박찬욱 감독은 아벨 페라라의 <배드 캅>(1992)을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올리기도 했고, 프랑스의 유서 깊은 영화비평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아벨 페라라의 작품을 그 해 최고의 영화 목록에 자주 올리기도 했다.

아벨 페라라의 팬으로서 가장 행복한 점은 그가 데뷔 이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해왔다는 거다. 저예산으로 빠르게 촬영한다는 B급 영화의 특징을 아벨 페라라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포르노 필름으로 데뷔한 그는 여전히 영화를 촬영 중이고, 최근에도 에단 호크 주연의 <제로스 앤 원스>(2021)를 발표하는 등 꾸준히 작품을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 킬링타임용으로 즐기는 B급 영화를 찍던 아벨 페라라는 어느새 유럽의 평단과 마니아의 지지를 받는 감독이 되었다. 늘 어두운 세계를 다뤄온 아벨 페라라의 작품을 보면서 누군가는 박한 평가와 함께 그의 영화가 아름답지 않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더러운 세상에 비하면 아벨 페라라의 B급 영화가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도 존재할 거다. 확실한 건, 어떤 평이 오든 그는 평소처럼 자신의 작품을 만들 거다. ‘B급 영화’와 ‘거장’이라는 전혀 안 어울려 보이는 두 단어를 함께 쓸 수 있는 감독, 아벨 페라라의 작품을 살펴보자.

아벨 페라라 감독, 이미지 출처 – imdb

 

<복수의 립스틱> (Ms .45)

‘타나’(조 룬드)는 뉴욕의 의상실에서 일하고 있다. 퇴근길마다 캣콜링에 시달리는 타나는 어느 날 가면을 쓴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강도를 만난다. 타나는 살아남기 위해 주변에 있는 물건을 강도에게 던지다가 그를 죽이게 된다. 타나는 시체를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그에게서 얻은 45구경 권총으로 세상에 복수를 시작한다.

아벨 페라라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복수의 립스틱>(1981)을 통해서다. 초기작답게 그의 작품 중에서도 B급 영화의 성격이 가장 짙게 드러난 작품이다. 주인공 타나의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연상시킨다. 주연을 맡은 조 룬드는 아벨 페라라의 대표작 <배드 캅>(1992)의 각본가이기도 하다. 저예산으로 만든 만큼 거친 질감으로 연출된 부분이 많은데, 오히려 이러한 스타일이 복수라는 소재를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복수의 립스틱>은 여성 복수 서사로, 복수의 과정을 지켜보는 마음은 복잡하다. 하루아침에 피해자가 되어 복수를 하는데, 복수의 쾌감보다는 역겨운 세상에 대한 증오가 더 크게 느껴진다. 복수극이 가진 가장 큰 아이러니는 아무리 통쾌하게 전개되어도, 복수 이후 남겨질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아벨 페라라가 그려낸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고, 현실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거다.

 

<킹 뉴욕> (King of New York)

‘프랭크 화이트’(크리스토퍼 월켄)는 뉴욕 뒷골목에서 왕으로 불리는 남자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세력을 넓힌 이들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간다. 한편 경찰들은 프랭크를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프랭크는 빠르게 어둠의 세계를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반대 세력과 경찰의 저항 또한 점점 거세진다.

최근 들어 아벨 페라라는 윌렘 데포와 가장 자주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킹 뉴욕>(1990)의 주연을 맡은 크리스토퍼 월켄은 아벨 페라라의 페르소나 중 한 명이다. 아벨 페라라는 한번 호흡을 맞췄던 배우와 여러 번 호흡을 맞추는 편인데, <킹 뉴욕>에서 형사로 등장하는 빅터 아고는 아벨 페라라의 작품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다. 크리스토퍼 월켄은 아벨 페라라의 작품에서 갱단 두목부터 뱀파이어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가진 개성은 영화에 독특한 분위기를 더한다.

뉴욕 지하 세계의 왕으로 불리는 프랭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절대왕정처럼 그가 군림하던 세계는 여러 세력으로 나눠진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다시 어둠의 세계를 통일하는 작업을 이어 나가면서, 자신의 논리를 앞세운다. 마약을 팔고 사람을 죽이는 게 일상이지만, 자신이 죽인 이들은 그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정당화하고, 또한 자신은 도시를 위해 병원도 후원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프랭크가 아니어도 갱단들은 폭력의 세계에서 왕이 되기 위해서 싸울 거다. 무법지대에서는 멋대로의 명분만 있을 뿐, 절대적인 정의란 없어 보인다.

 

<배드 캅> (Bad Lieutenant)

뉴욕에는 나쁜 형사(하비 케이틀)가 한 명 있다. 수시로 마약을 하고, 그의 최대 관심사는 야구 경기의 승패에 돈을 거는 일이다. 그에게 도시의 치안보다는 사건 현장에서 몰래 마약을 챙기는 게 더 우선처럼 보인다. 나쁜 짓만 골라하고 있는 그는 성당의 수녀가 성폭행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사를 시작한다.

박찬욱 감독은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B급 영화에 대한 사랑을 밝힌 바 있다. 그의 베스트영화 목록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아벨 페라라의 <배드 캅>(1992)이다. 아벨 페라라의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이 많지만, 그의 작품에서 가장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배드 캅>의 하비 케이틀일 거다.

<배드 캅>은 제목 그대로 나쁜 경찰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가장 집중하는 건 큰돈을 베팅한 야구 경기이고, 공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는데 죄책감도 없다. 자신을 파괴하기 위한 일만 골라서 하는 그의 직업은 경찰이기에, 그는 늘 악에 노출되어 있다. 무엇이 더 나쁜지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충분히 나쁜 짓만 골라하고 있는 그의 눈에도 사악해 보이는 이들이 존재한다. <배드 캅>을 다 보고 나면 그가 한 줌의 정의와 팔 할의 불의로 이뤄진 것 같지만, 세상은 늘 그 비율의 차이가 있을 뿐 정의와 불의가 공존해왔다. 그는 언제부터 나쁜 경찰이 된 걸까? <배드 캅>의 프리퀄을 상상해본다.

 

<보디 에일리언> (Body Snatchers)

‘마티’(가브리엘 앤워)는 연구자인 아버지 ‘스티브’(테리 키니)가 군부대에 파견되자 새어머니 ‘캐롤’(멕 틸리)과 동생 ‘앤디’(레일리 머피)와 함께 떠나게 된다. 새어머니와 아직 서먹하고 아버지와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마티는 군부대에서 헬리콥터 조종사 ‘팀’(빌리 워드)과 가까워진다. 마티는 점점 군부대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군부대에 오기 전 주유소에서 낯선 이에게 들었던 ‘잠들지 말라’는 말을 떠올린다.

<보디 에일리언>(1993)은 잭 피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1956년 돈 시겔의 작품과 1978년에 필립 카우프만의 작품에 이어 3번째 영화화일 만큼, 감독들에게 사랑받아 온 소설이다(이후 2007년에 니콜 키드먼 주연으로 4번째 영화화가 이뤄졌다). 아벨 페라라의 첫 SF 장르 영화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다. 독특한 점이라면 아벨 페라라는 시각적인 효과보다 희망이 사라져가는 세계를 구현하는데 집중한다는 거다.

캐롤은 아버지와 새어머니, 동생까지 함께 군부대로 온 이후, 새로운 가족부터 낯선 환경까지 모든 면에서 적응하기 바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제대로 된 소통이 힘들 때 우리는 고립감을 느끼고, 어쩌면 그 감각은 낯선 행성에 불시착했을 때와 다르지 않을 거다. <보디 에일리언>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낯선 존재를 등장시키며, 캐롤로 하여금 적응할 틈도 없이 생존을 고민하게 만든다. SF영화임에도 시각효과보다 캐롤이 적응과 생존을 고민하는 과정이 집중한다. 어떤 영화든 가장 중요한 건 그럴듯한 특수효과보다도 인물에게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 하는 거다.

 

<어딕션> (The Addiction)

‘캐슬린’(릴리 테일러)은 철학 박사 과정 중인 학생이다. 어느 날 뱀파이어에게 물리면서 캐슬린은 뱀파이어가 된다. 캐슬린은 흡혈을 시작하면서 변하는 자신을 느낀다. 흡혈을 이어가던 중 다른 뱀파이어 ‘페이나’(크리스토퍼 월켄)를 만나는데, 그는 흡혈도 안 한 채 인내하면서 산다고 말한다. 캐슬린은 흡혈의 욕망과 함께 중독에 대해 생각한다.

아벨 페라라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어딕션>(1995)은 뱀파이어 영화다. 붉은 피가 도드라져야 할 것 같은 영화임에도 아벨 페라라의 선택은 흑백이다. 도대체 어떤 뱀파이어가 나오기에 흑백으로 전개되는 걸까? <어딕션>의 뱀파이어는 사유한다. 카틀린이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뱀파이어가 된 이후로는 책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흡혈이라는 본능을 느끼며 사유한다.

크리스토퍼 월켄이 연기한 페이나는 또 다른 뱀파이어로, 그는 흡혈을 안 하는 단식을 택하고 인간처럼 살아간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사유하는데, 좀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질문을 그대로 뱀파이어에게 적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 거다. 인간의 삶을 위한 철학은 책을 통해서 공부할 수 있지만, 뱀파이어를 위한 철학은 찾기 어려우니까. 그러므로 뱀파이어는 흡혈의 본능을 느끼며 온몸으로 사유한다.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건 공통적인 본능이다. 뱀파이어의 수명은 인간보다 길다고 알려져 있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의 재료가 필요할 거다. 날아다니거나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뱀파이어가 되는 상상을 해본 이들이라면, <어딕션>을 보면서 뱀파이어이기에 가능한 사유에 대해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