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제한적일까? 소재와 표현에 있어 예술가들의 자의적, 타의적 검열은 필연으로 보인다. 그런데 논란이나 검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영화감독이 있으니, 그는 바로 폴 버호벤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갈릴 수 있지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용기에 있어서 폴 버호벤은 단연 독보적이다. 

네덜란드에서 <서바이벌 런>(1977), <포스 맨>(1983) 등으로 주목받던 폴 버호벤은 할리우드에서 <로보캅>(1987), <토탈 리콜>(1990), <원초적 본능>(1992)을 연달아 만들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할리우드에서의 전성기는 <쇼걸>(1995), <스타쉽 트루퍼스>(1997), <할로우 맨>(2000)의 연이은 흥행 실패로 끝나고,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온다. <쇼걸>이 최악의 영화를 뽑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폴 버호벤은 기꺼이 시상식에 참석해서 트로피를 받는다. 폴 버호벤이 할리우드에 남긴 작품들은 개봉 당시의 혹평과 달리 지금까지도 재평가 받고 있고, 그가 할리우드의 긴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남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할리우드에서 돌아온 폴 버호벤은 <블랙북>(2006), <엘르>(2016), <베네데타>(2021)까지, 미국에서 유럽으로 무대만 바꾼 채 여전히 자신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폴 버호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런 소재와 표현은 폴 버호벤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차기작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어떤 작품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폴 버호벤이라면 남들이 자기 검열로 포기했을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거다. 논란의 소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감독, 폴 버호벤이 유럽에서 찍은 영화를 살펴보자.

폴 버호벤 감독(왼쪽)과 배우 이자벨 위페르(오른쪽), 이미지 출처 – imdb

 

<포스 맨>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사는 작가 ‘제랄드’(예로엔 크라베)는 강연을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난다. 평소에 여러 환상에 시달리는 제랄드는 역에서 우연히 한 청년(톰 호프만)을 보고 강한 끌림을 느낀다. 강연장에 도착한 제랄드는 행사비를 후원해주는 ‘크리스틴’(레니 소우텐디크)의 초대를 받고, 크리스틴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크리스틴이 세 명의 남자와 결혼과 사별을 연달아 겪었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역에서 우연히 본 청년이 크리스틴과 만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제랄드는 자신이 크리스틴의 네 번째 남자가 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현실과 구분하기 힘든 환상에 시달린다.

<포스 맨>(1983)은 네덜란드의 소설가 제랄드 리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영화의 주인공 이름도 원작을 쓴 작가의 이름에서 따왔다. 성적 에너지를 품은 스릴러 중 가장 대표적인 영화라면 폴 버호벤의 <원초적 본능>(1992)일 텐데, <포스 맨>은 이미 그가 할리우드에 진출하기 전부터 이러한 연출에 능했다는 걸 보여준다. <포스 맨>은 성, 죽음, 종교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폴 버호벤은 소재에 짓눌리기보다 그것들을 능숙하게 섞어서 보여준다.

제랄드는 계속해서 의미 부여를 한다. 크리스틴의 ‘네 번째 남자’(The Fourth Man)가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강박이 생긴 이후로 온갖 부정적인 의미 부여를 시작한다. 역에서 우연히 쳐다본 관에 적힌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잘못 보고, 거세당하는 악몽을 꾸는 등의 현상을 크리스틴에 대한 의심과 연결시킨다. <포스 맨>에서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진실보다 무엇을 믿을지 선택하는 게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나의 운명은 과연 내 믿음처럼 흘러갈까? 의미 부여가 나의 힘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블랙북>

2차 세계대전 속에서 네덜란드의 유대인 ‘레이첼’(캐리스 밴 허슨)은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기 위해 배를 탔다가 독일군에게 습격당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이첼은 ‘한스’(톰 하프만)가 이끄는 레지스탕스에서 스파이 업무를 맡는다. 레이첼은 나치의 장교 ‘문츠’(세바스티안 코흐)를 유혹해 잠입에 성공하고, 자신의 가족을 죽인 장교 ‘프랑켄’(발데마르 코부스)의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다. 레이첼은 문츠와 점점 더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한스와 일행은 인질로 잡힌 이들을 구하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블랙북>(2006)은 <할로우 맨>(2000)으로 할리우드에서의 생활을 마친 폴 버호벤이 오랜만에 네덜란드로 돌아와 만든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폴 버호벤의 작품답게 전쟁과 로맨스라는 소재 안에서 뻔하게 전개될 수 있는 부분들을 철저히 피해간다. 유대인 레이첼부터 나치 장교 문츠, 레지스탕스 리더 한스까지, ‘유대인’, ‘나치’, ‘레지스탕스’ 등 그들이 속한 집단이 주는 편견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묘사된다.

레이첼은 전쟁 내내 고통받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주변에서 레이첼에게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지만, 레이첼은 사람에 대한 희망조차 없으면 진즉 삶을 포기했을 인물이다. 서로의 믿음을 배반하는 게 너무 당연한 전쟁 속에서, 레이첼은 믿음을 무기처럼 갖추고 살아간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믿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 전쟁 속에서 무용해 보이는 인간에 대한 희망이, 레이첼의 무기가 된다.

 

<엘르>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자신의 집에 침입한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복면을 쓴 괴한이 떠난 뒤 미셸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어질러진 집의 깨진 그릇 등을 치우고 거품 목욕을 한다. 며칠이 지난 뒤 지인이 모인 자리에서 미셸은 자신이 얼마 전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한다. 게임 회사 대표인 미셸은 누군가가 회사 직원들에게 단체 메일로, 게임 속 강간당하는 캐릭터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영상을 보낸 걸 발견한다. 미셸은 자신의 주변에 일어난 일을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자신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블랙북>(2006)이 폴 버호벤이 할리우드를 떠나 유럽으로의 복귀를 알린 영화라면, <엘르>(2016)는 그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필립 지앙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관객의 예상을 완전하게 벗어나는 영화다. 보는 내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전개가 이어지는데, 특히나 이자벨 위페르는 다른 배우들이었다면 도전조차 쉽지 않을 배역을 맡아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다.

미셸은 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미셸 주변을 머무는 전 남편, 엄마, 아들은 오히려 미셸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게 더 많고, 미셸은 그런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다. 여러 상황 속에서 미셸은 늘 피해 보는 듯 보이지만, 미셸은 세상이 말하는 ‘피해자다움’을 거절한다. 세상이 자신에게 바라는 역할 대신 자신이 정한 방식을 고수한다. 인간은 어떤 폭력에 예민한 동시에, 어떤 폭력에는 한없이 무디다. 시시각각 일상을 파고드는 폭력을 모조리 제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내 곁에 머무는 폭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미셸은 특수한 상황이 만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보편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베네데타>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가서 자라고, 성인이 된 후로 예수의 환영을 자주 목격한다. 어느 날,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는 ‘바트롤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가 살려 달라며 수녀원으로 달려들고, 베네데타는 곁에 있던 부모님을 설득해서 바트롤로메아와 함께 수녀원에서 지낸다. 베네데타와 바트롤로메아는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점점 둘은 서로에게 빠지고, 베네데타는 예수의 계시를 받았다는 걸 주변에 증명하며 성녀로 추앙받는다.

<베네데타>(2021)의 줄거리를 보면 폴 버호벤이 엄청난 상상을 했구나 싶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내에 ‘수녀원 스캔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주디스 브라운의 책이 원작으로, 여성의 동성애가 성립 불가하다고 믿던 시대에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38년에 태어난 폴 버호벤은 그 어떤 젊은 감독들의 영화보다도 논쟁적인 소재를 기꺼이 선택한다.

수녀원에 들어온 베네데타는 수녀원에서 생활복으로 입게 될 옷을 입으며 불편하다고 말하고, 불평하는 베네데타에게 ‘몸이 가장 큰 적이야’라는 답이 돌아온다. <베네데타>는 육체를 강조한다.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감정은 몸이 닿았을 때 선명해지고,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채찍질을 비롯한 각종 폭력이 당연한 듯이 일어나고,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는 몸의 상처다. 베네데타의 몸에는 시대가 부정하는 욕망과 세상이 원하는 신의 계시가 함께 깃들어 있다.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으로 분류되는, 정반대되는 가치가 내면에 공존하는 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성녀도, 악녀도 없다. 그저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 세상에 기억된 그 이름, 바로 베네데타.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