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과 주변을 살피기에도 삶은 빠듯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가끔은 나와는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해진다. 지금 내가 겪는 일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을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모습일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삶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까? 그곳의 삶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영화를 보는 것이다.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화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 닿아본다. 남미의 예술을 말할 때 언급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느낄 수 있는 작품부터, 아르헨티나 정치 상황에 대한 은유가 담긴 드라마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온 영화들을 살펴보자.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벤야민 에스포지토’(리카도 다린)는 25년 전에 법원 직원으로 일하며 맡았던 성폭행 살인 사건을 소설로 풀어내기로 결심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당시 자신의 상사이자 마음을 품었던 ‘이레네’(솔레다드 빌라밀)와 재회한다. 과거에 둘은 함께 범인을 잡지만, 정부는 범인을 반정부 게릴라 소탕에 활용하고 그를 풀어준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서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갔던 과거부터 다시 재회하기까지의 시간을 돌아본다.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2009)는 그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자크 오디아르의 <예언자>(2009), 미하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2009)을 제치고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화제가 된 작품이다. 2015년에는 할리우드에서 <시크릿 인 데어 아이즈>(2015)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었고, 니콜 키드먼, 줄리아 로버츠, 치웨텔 에지오프가 주연을 맡았다.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는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인터랙티브 무비였다면 어땠을까 싶을 만큼, 인물들의 선택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애석하게도 197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인물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한정되어 있다. 선량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상처 입은 자들의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기는커녕 더 선명해질 뿐이다. 암울했던 시대의 짐을 짊어지는 건 온전히 시민들이다. 세상이 남긴 상처임에도 세상이 침묵할 때, 개인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무기력일 수밖에 없다.

 

<클랜>

‘아르키메데스 푸치오’(기에르모 프란셀라)는 남들 눈에 평범해 보이는 가장이다. 사실 그는 군부의 정보부 출신으로, 군부 독재가 끝나가자 자신의 기술을 살려서 부유층 인물을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하며 돈을 뜯어낸다. 그의 아들 ‘알렉스’(피터 란자니)는 촉망받는 럭비 유망주로, 아버지의 일을 돕는다. 푸치오의 가족들은 집 안 어딘가에서 납치한 이들을 고문하고 가둬둘 동안에도, 평화롭게 자신들의 생활을 이어나간다.

<클랜>(2015)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으로, 연출을 맡은 파블로 트란페로 감독은 <크레인 월드>(1999), <비밀 경찰>(2002), <사자굴>(2008), <카란초>(2010) 등의 작품을 통해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감독이다. <클랜>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아르헨티나에서 1,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제작으로 참여했는데,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파블로 트란페로와 루크레이사 마르텔 등 아르헨티나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며 그들의 영화가 국제무대에 소개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클랜>의 가장 큰 특징은 실화라는 사실이다. 집 안에 누군가 감금되어 있지만 가족들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에 대해 회의감을 품는 가족 구성원에게는 최면에 가까운 설득과 합리화가 쏟아진다. 가족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어린 시절부터, 나의 가족이 납치, 협박, 고문을 통해 돈을 벌고, 내가 그 돈으로 생활을 해나간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나의 평화가 누군가의 평화를 파괴해서 얻은 대가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평소 같았으면 쉽고 당연했을 선택도 가족과 나의 안위가 엮이는 순간 복잡하게 느껴지기에, 세상은 늘 혼란하다.

 

<우등시민>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다니엘 만토바니’(오스카 마티네즈)는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고향을 떠나 스페인의 자택에 머물고 있던 다니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각종 행사와 강연 요청을 모두 거절한다. 그러던 중 고향 아르헨티나의 작은 도시 살라스에서 다니엘을 우등시민으로 선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혼자 고향 살라스에 간 다니엘은 자신에 대한 환대와 함께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마리아노 콘과 가스통 듀프랫이 공동 연출한 <우등시민>(2016)은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으로, 두 감독은 연출뿐만 아니라 촬영 또한 공동으로 맡았다. 노벨상 수상 작가 다니엘을 연기한 주연배우 오스카 마티네즈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우등시민>은 장르를 따지자면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영화로, 풍자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다니엘에게 고향은 떠나고 싶은 동시에 영원히 떠날 수 없는 공간이다. 고향을 탈출하고 싶어 해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지내지만, 결국 그가 소설에 담은 내용 대부분은 고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니엘은 강연 도중 ‘삶이 불행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냐’고 묻는 독자에게 아니라고 답하지만 후에 답을 정정한다. 떠나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한 곳이지만, 그곳에서만 예술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술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자마>

18세기, ‘자마’(다니엘 히메네즈 카초)는 스페인의 치안 판사로 파라과이 아순시온에 파견된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자마는 다른 도시로의 전출을 원한다. 총독에게 자신의 전출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계속해서 부탁하나, 자마에게 이곳을 떠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늪>(2001), <홀리 걸>(2004), <얼굴 없는 여자>(2008) 등을 연출한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은 불편한 현실을 매혹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며 전 세계 평단의 지지를 받아왔다. <자마>(2017)는 소설보다 시에 가까운 영화로, 장면과 장면 사이의 인과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게 쉽지 않은 작품이다. <자마>는 러닝 타임 내내 영화의 배경부터 캐릭터의 심경까지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남미 예술에 대해 가장 많이 쓰는 표현 중 하나인 ‘마술적 리얼리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자마는 영화 내내 등장하지만 유령처럼 보인다. 그는 분명 어딘가를 바라보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땅을 밟고 있지만 부유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마가 관심을 보이는 이는 그에게 관심이 없고, 마을을 위협하는 도적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호하며, 자신과 싸운 부하는 자마가 그토록 원하던 도시로 먼저 전출된다. 자마는 자신이 이곳에 존재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머물고 있지만 떠나는 순간을 꿈꾸는 이방인의 마음을 가진 자마를 보며, 정착이란 발로 땅을 밟는 게 아니라 마음의 닻을 내리는 일이라는 걸 느낀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용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