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포러리 레코드 시절 햄프턴 호스의 명반 셋

교회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세 살부터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마스터한 신동이었다. 10대 이른 나이에 고향 로스앤젤레스의 재즈신에서 아트 페퍼, 워델 그레이, 덱스터 고든과 같은 거장들과 연주했고, 빌리 홀리데이, 찰리 파커와 같은 스타들의 무대에도 나섰다. 제대 후 중반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대표 레이블 컨템포러리(Contemporary)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내놓은 피아노 트리오 앨범 <Hampton Hawes Trio>(1955), <This Is Hampton Hawes>(1955~1956), <Everybody Likes Hampton Hawes>(1956) 세 장은 그의 당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명반으로 꼽힌다.

<Hampton Hawes Trio>(1955)에 수록한 대표곡 ‘I Got Rhythm’

그가 젊은 시절 함께 어울린 뮤지션들은 당대 최고 스타들이었지만 워델 그레이를 제외한 모두 마약 상용자들이었고, 그 역시 자연스럽게 마약에 빠져들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젊고 유망한 피아니스트였던 그에게 마약을 멀리하도록 적극 조언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그는 결국 마약 소지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마약 공급자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보복에 가까운 10년형에 처해졌다. 그가 재판을 받는 동안 녹음한 앨범이 <The Sermon>(1958)인데, 이 앨범은 30여 년이 지난 1987년이 되어서야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그가 재판 중 겪은 괴롭고 답답한 심정을 격정적인 ‘스피리추얼’(교회 영가) 여덟 곡에 담아내고 있다.

<The Sermon>에 수록한 ‘The Sermon’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호스는 우연히 TV에서 방송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주위의 만류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판 결과가 부당하다며 사면을 청원하는 편지를 백악관으로 보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해였던 1963년 초 극적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는 주위의 우려를 불식하듯 마약과 완전히 결별하고 건강을 되찾아 이듬해 재즈 무대로 복귀했다.

프레스티지 시절의 햄프턴 호스 명반 셋

그가 다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프레스티지(Prestige)와 계약한 후다. 당시 재즈 무대의 대세가 되었던 전자 악기를 받아들여 <Universe>(1972), <Blues for Walls>(1973), <Playin’ in the Yard>(1974)와 같은 앨범을 냈고 유럽으로 활발하게 공연을 다니면서 예전의 인기를 회복했다. 그가 동향 출신인 유명 프로듀서 데이비드 액셀로드와 친분을 나눈 것도 이 즈음이다.

다소 저평가된 미국과는 달리 그는 유럽에서 컬트와 같은 존재로 인정받았다(Hampton Hawes in Paris)

호스가 무엇보다 재즈계에 남긴 소중한 유산은 자서전 <Raise Up Off Me>(1974)이다. 특유의 솔직한 문체로 당시의 재즈 무대와 감옥 생활, 그리고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경험담을 남겨 재즈 역사의 중요한 사료로 남았다. 그는 49세이던 1977년에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재즈센터는 호스를 추모하여 인근 골목을 ‘Raise Up Off Me Alley’라 불렀다.

자서전 <Raise Up Off Me: A Portrait of Hampton Haw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