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로 넘어오며 영국에 'Hauntology'(의역: 유령론)라고 부르는 새로운 음악 장르가 소개되었다. 이 용어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저서 <Spectres of Marx>(맑스의 유령, 1993)에 처음 나왔는데, 유령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를 통해 과거의 요소들에 집착한다는 뜻이다. 이 개념은 시각예술이나 문학 등 다방면에 차용되었고, BBC의 음향효과 프로젝트(Radiophonic Workshop)를 통해 일렉트로닉 음악의 서브 장르로 발전했다. 고스트 박스(Ghost Box) 같은 전문 레이블도 생겼다. 이 음악은 과거의 음향이나 음악을 샘플링하여 오래된 기억, 향수, 우울증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오랜 아날로그 재생 과정에서 파생된 노이즈는 결함(Defect)이 아닌 효과(Effect)로 파악된다. 대표적인 뮤지션 셋을 알아보았다.

 

케어테이커(The Caretaker)

영국의 일렉트로닉 뮤지션 제임스 레이랜드 커비(James Leyland Kirby)의 프로젝트명이다. 영화 <샤이닝>(1980)의 연회장(ball room) 장면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1930년대 연회장에서 쓰던 팝 음악을 샘플링하여 만든 앨범 <Theoretically Pure Anterograde Amnesia>(2005)와 <An Empty Bliss Beyond This World>(2011)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2016년부터 선보인 마지막 작품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은 알츠하이머와 같은 치매 증상의 6단계를 차례로 다루었으며, 이를 마지막으로 케어테이커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Leyland Kirby' 또는 'The Stranger'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The Caretaker <An Empty Bliss Beyond This World>(2011)

 

베리얼(Burial)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음반을 발표하던 사우스 런던 출신 윌리엄 엠마누엘 베반(William Emmanuel Bevan)의 예명이다. 첫 앨범 <Burial>(2005)이 <와이어(Wire)>의 '올해의 음반'(Album of the Year)으로 선정되었고, 두 번째 앨범 <Untrue>(2007) 역시 최상의 평가를 받으며 언론이 그의 정체를 쫓기 시작했다. 유명 뮤지션들이 의혹의 시선을 받기도 했으나, 인디펜던트 신문이 그의 정체를 밝히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두 장의 정규 음반 후에는 EP 형식으로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며, 매시브 어택이나 톰 요크와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설치 미술이나 다큐멘터리의 배경 음악으로 자주 채택된다. 여전히 인터뷰나 대중 공연 없이 활동하는 수수께끼 뮤지션이기도 하다.

Burial의 앨범 <Untrue>(2007)에 수록한 ‘Archangel’

 

필립 젝(Philip Jeck)

영국의 작곡가 겸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낡은 턴테이블, 바이닐 음반이나 루핑 장치를 이용하여 음악을 만든다. 시각 예술을 전공한 그는 설치 작품이나 무용단, 그리고 연극 공연장의 배경 음악을 만들다가 뒤늦게 나이 마흔이 넘어서 <Loopholes>(1995)을 시작으로 <Surf>(1998), <Vinyl Coda> 시리즈로 이어지는 자신의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여덟 번째 앨범 <Sand>(2008)는 <와이어> 올해의 음반 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Philip Jeck의 Boiler Room X St John Live Set(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