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올해 최고의 기대작 중 하나는 지난 25일 개봉한 <돈 워리>(2018)일 거다. 호아킨 피닉스, 루니 마라, 잭 블랙 등 화려한 캐스팅이 눈에 들어오는데, 기대를 품게 만드는 건 감독 ‘구스 반 산트’의 존재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인디 영화 <말라 노체>(1985)로 데뷔 후 다양한 실험을 계속해왔고, <굿 윌 헌팅>(1997)으로 할리우드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등 도전을 멈추지 않는 감독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

구스 반 산트는 인물들의 감정을 대사보다 장면의 분위기로 보여주는 걸 선호한다. 주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의 작품에서, ‘외로움’은 마치 공기처럼 깔린 정서다. 외로움을 연구하는 과학자처럼, 구스 반 산트는 외로움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다.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게 만드는, 구스 반 산트의 작품을 살펴보자.

 

<아이다호>

긴장하면 갑자기 잠드는 기면 발작증으로 고생하는 ‘마이크’(리버 피닉스)는 포틀랜드에서 몸을 팔며 살고 있다. 포틀랜드 시장의 아들 ‘스콧’(키아누 리브스)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가출한 뒤, 부랑자들의 대부 ‘밥’(윌리엄 리처드)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지낸다. 마이크와 스콧은 함께 방황하며 가깝게 지낸다. 마이크는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로 마음먹고, 스콧도 이에 동참한다.

<아이다호>(1991)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를 원작으로 새롭게 창조한 작품이다. 스콧과 밥은 ‘헨리 4세’ 속 망나니처럼 구는 헨리 왕자와 그와 어울려 다니는 ‘폴스타프’를 연상시킨다. 스콧에게 방황은 잠깐의 일탈이지만, 마이크는 길거리가 자신의 집이자 삶이다. 도로 한복판에서도 잠이 드는 마이크의 삶은, 언제 쓰러져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고 외롭다.

<아이다호> 트레일러

구스 반 산트의 최근작 <돈 워리>(2018)의 주연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리버 피닉스의 친동생으로, <아이다호>(1991)는 리버 피닉스의 대표작이다. 리버 피닉스는 <아이다호>로 제48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스물세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를 기억하기 위해 <아이다호>를 본다. 언제 잠들지 모르는 위태로움을 품은 리버 피닉스가 아이다호의 도로 위에 서 있다. <아이다호>의 마지막은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구원이 함께하는 엔딩이라고 믿어본다.

 

<엘리펀트>

교외의 한 고등학교.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때문에 걱정인 ‘존’(존 로빈슨), 학교 안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사진을 찍는 ‘일라이’(일라이 멕코넬),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하는 ‘미셸’(크리스틴 힉스) 등 학생들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왕따 ‘알렉스’(알렉스 프로스트)와 그의 친구 ‘에릭’(에릭 두런)는 인터넷으로 산 총들을 챙기고 학교에 찾아간다.

<엘리펀트>(2003)는 제56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받은 작품이다.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같은 소재를 다룬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2002)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연출을 보여준다. 구스 반 산트는 총기사건보다, 사건 전에 인물들의 일상에 존재했던 순간순간에 더 집중한다.

<엘리펀트> 트레일러

<엘리펀트>의 화면 비율은 1.33:1이다. 와이드스크린의 등장 이후로 영화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화면 비율로, 오히려 사진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비율이다. 구스 반 산트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이제는 다시 못 볼 그들의 일상을 눈에 담고, 사진처럼 영원히 남긴다. 삶은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순간으로 가득하고, 구스 반 산트는 조용히 그 순간을 바라보는 데 시간을 쏟는다.

 

<라스트 데이즈>

‘블레이크’(마이클 피트)는 숲속에 위치한 거대한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지만,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친구와도, 수화기 반대편에서 용건을 말하는 상대방과도, 집으로 찾아오는 이들과도 관계 맺지 못한다. 블레이크는 계속 불안한 모습으로 도망치듯 돌아다닌다.

구스 반 산트의 <제리>(2002), <엘리펀트>(2003), <라스트 데이즈>(2005)를 묶어서 ‘죽음 3부작’으로 부르기도 한다. 세 편 모두 해리스 사비데스가 촬영을 맡았고, 인물의 뒷모습을 담은 롱테이크가 많다. 세 편 모두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라스트 데이즈> 트레일러 

구스 반 산트가 <엘리펀트>에서 실제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의 실제 삶이나 죽음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커트 코베인을 연상시키는 인물의 이름은 ‘블레이크’이고, 너바나의 음악은 단 한 곡도 등장하지 않는다. 블레이크는 분명 살아있음에도 마치 부유하는 영혼처럼 방황한다. 죽음에 몸을 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주변 사람과 풍경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블레이크의 마음을 함부로 추측할 수 없기에, 그의 몸짓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을 바라본다.

 

<파라노이드 파크>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 가장 즐거운 10대 소년 ‘알렉스’(게이브 네빈스). 부모님은 이혼을 고려 중이고, 여자친구 ‘제니퍼’(테일러 맘슨)와 자신이 잘 맞는지도 고민이다. 알렉스는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는 이들의 각지에서 모이는, 거친 분위기로 유명한 파라노이드 파크에 간다. 알렉스는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과 어울리다가 잊을 수 없는 일을 겪는다.

<파라노이드 파크>(2007)는 블레이크 넬슨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왕가위 감독과 주로 호흡을 맞춰 온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싸이코>(1998) 이후 거의 10년 만에 구스 반 산트와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촬영은 35mm 카메라로 이뤄졌지만, 영화에 삽입된 스케이트 보더들의 모습은 실제로 스케이트 보더들이 사용할 만한 저렴하고 작은 크기의 슈퍼 8mm 카메라로 촬영했다.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 예고편

<파라노이드 파크>는 알렉스의 성장기이다. 알렉스는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그의 모습은 활기로 가득하다. 반면 알렉스가 얻게 되는 비밀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어둡다. 파라노이드 파크에 가자는 친구의 말에, 알렉스는 아직 거기에 갈 준비가 안 됐다고 답한다. 친구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갈 준비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답한다. 삶에서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들만 늘어나는데, 그걸 성장이라고 불러야 할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이 늘어나는 게 성장이라면, 성장통은 사춘기가 아니라 삶 전체에 머무는 아픔이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