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3월 19일 뉴욕 신문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시민들은 뉴욕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던 셀럽 한 명을 잃게 되었고, 뉴욕 지하철 바닥이나 건물 벽 또는 인도에 누군가가 분필이나 크레용으로 “Bird Live!”라는 문구를 썼다. 이를 뉴욕 그래피티 문화의 출발점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이 서른 넷의 한창 나이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알토 색소폰 스타는 어떻게 하루 아침에 죽음을 맞았을까? 당시로 돌아가 보았다.

찰리 파커와 사실혼 관계의 챈 파커

 

세살 난 딸 아이의 죽음

파커는 나이 서른이 되던 1950년에 클럽 댄서이자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챈(Chan)과 뉴욕에 아파트를 구해 동거를 시작했다. 전 부인과 이혼하거나 챈과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사실상 혼인 관계였고, 그와 함께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하지만 딸 Pree는 오랫동안 병치레를 한 끝에 세 살 무렵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이 때 파커는 공연을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전화로 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위스키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무명 시절 순회공연 중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그 통증을 잊기 위해 시작한 마약과 폭음 습관은 더 악화했고, 그 해 9월에는 요오드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딸이 사망했을 당시,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1년이었다.

Charlie Parker & Dizzie Gillespie on TV Show 'Hot House'(1952)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

어린 딸을 보내고 엉망이 되었던 그의 삶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는 해고되었던 재즈클럽 버드랜드(Birdland)에서 다시 공연을 시작했다. 1954년 12월 10일에는 그는 뉴욕의 파인사운드 스튜디오에서 생애 마지막 녹음을 하였다. 퀸텟 편성으로 ‘Love for Sale’과 ‘I Love Paris’ 두 곡을 마스터 테이크로 건질 수 있었다. 음반에 실을 만한 추가 녹음을 위해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날 녹음은 찰리 파커의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이 되었으며,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전성기의 속도와 힘을 많이 잃었음을 느낄 수 있다.

찰리 파커의 마지막 녹음 ‘Love for Sale’(1954)

 

직접적인 사망 원인

마지막 날, 그는 버드랜드에서의 연주를 마치고 한밤에 만취하여 유명한 재즈 후견인이었던 남작 부인 Pannonica(애칭 Nica)을 만나러 갔다. 그는 5번가의 스탠호프(Stanhope) 호텔 스위트에 장기 투숙하고 있었다. 그를 잠시 본 후 거실에서 홀로 TV를 보던 그는 피를 토하고 이내 의식을 잃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앰뷸런스 요원은 그의 사망을 확인했고, 검시 보고서에 그의 나이를 50~60대로 추정해 적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졌다. 최종적으로 드러난 사인은 복잡했다. 폐렴과 출혈성 궤양, 그리고 간 경변 증세와 심장마비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계속된 과음과 마약 과용이 축적된 끝에, 이날 한꺼번에 터져 그의 생을 앗아간 것이었다.

폴 데스몬드와의 라디오 인터뷰(1954). 루키 시절 3~4년간 하루 11~15시간 색소폰을 연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소개된다

 

사후 수습

그는 생전에 뉴욕에 조용히 묻히고 싶다고 말했으나,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시신을 고향 캔자스시티로 운구했고, 그가 종교를 믿지 않았음에도 가족의 희망에 따라 가톨릭 방식으로 다시 장례를 치렀다. 법적인 권리가 없었던 미망인 챈은 이를 비난하며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막역했던 동료 디지 길레스피가 뉴욕에서의 장례식과 추모 연주회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챈 파커는 2년 후 버드를 추종하던 색소포니스트 필 우즈(Phil Woods)와 재혼하여 프랑스로 이주하고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99년 자서전 <My Life in E-Flat>을 내고 그해에 생을 마감했다.

캔서스시티에 있는 그의 묘지에는 아직 팬들이 모여든다(2009)

 

찰리 파커의 뉴욕 아파트

그가 챈과 함께 입주하여 사망할 때까지 4년간 살았던 이스트빌리지 아파트(151 Avenue B) 건물은, 1849년에 지어진 타운하우스로 뉴욕의 랜드마크 보존재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1979년에는 재즈 공연에 관여하던 사업가가 인수하여 세실 테일러, 맬 왈드런 등 재즈 뮤지션들의 리허설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고, 현재는 다섯 가구가 입주한 공용 아파트로 쓰고 있다. 수년 전에는 925만 달러(약 110억 원)에 매각 광고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