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베를린에서/숨바꼭질을]은 베를린의 공간을 탐색하고 파헤쳐낸 연속적 결과물이다. 베를린에서 약 8년을 거주한 필자는 때로는 학업에, 때로는 일에 치여서 소위 ‘힙’하다는 이 도시를 여전히 잘 모른다. 사실 새로운 것에 워낙 조심스러운 성격이 이러한 사태를 발생시킨 근본적인 이유겠지만 너무 재미없게 지냈음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날 베를린은 전 세계 곳곳의 문화와 예술이 중첩되면서 다양성 그 이상의 변주를 생산하고 소멸시키고 있다. 그만큼 새로움의 환기 속도가 빠르다. 필자는 방구석에 앉아서 타자를 두드리는 소극적인 행위를 탈피하여,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일종의 모험을 떠나고자 한다. 그래 봤자 베를린 안이겠지만, 필자에게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위대한 한 걸음이 되리라.

 

Renate Comics

Renate Comics 외관


첫 번째로 소개할 공간은 베를린의 상업 갤러리가 모여있는 Auguststraße 근처에 위치한 ‘Renate Comics’다. 양옆의 가게들과 따닥따닥 붙어있어서 자칫하면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창문에 그래픽노블과 일러스트 포스터가 떡 하니 붙어 있는 곳은 이곳뿐이기에 매의 눈을 가동해서 조금만 집중을 한다면 이곳이 Renate Comics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가게 내부로 들어서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나름의 입체감을 경험할 수 있다. 정면에는 만화책으로 빼곡한 책장이 들어서 있고, 따뜻한 노란색 불은 멀리서도 당장 책 한 권을 뽑아서 읽고 싶게 만든다. 샛노란 불빛에 몽롱하게 취해서 앞뒤 재지 않고 직진하려던 찰나, 다양한 굿즈가 눈앞에서 발길을 붙잡는다. 엽서와 포스터가 보이고, 얇은 일러스트 북들도 눈에 띈다. 그리고 심지어 티셔츠까지 있다. 휘황찬란한 상품들이 발아래서부터 천장까지 가득하다. 들어서며 느꼈던 정체 모를 입체감은 분명 여기서 발현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굿즈와 판매용 책이 있는 공간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는데, 이곳은 단순히 책을 입고해서 판매하는 책방이 아니라는 것을 느닷없이 깨닫는다. 앞서 안으로 들어서면서 보였던 만화책 가득한 책장은 사실은 도서관이었다. 만화책 도서관이라. ‘만화책’과 ‘도서관’은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필자에게 만화책은 노는 것의 상징으로 그리고 도서관은 공부하는 것의 상징으로 마주 보고 있는 극점이기에 두 단어가 합성어로 쓰이는 모습이 영 부자연스럽다.

만화책 도서관 모습, 만화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아무튼 이곳은 책과 굿즈를 판매하는 것과 동시에 만화책 도서관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 이미 널리 알려진 여타 독립 책방과 느낌이 다르다.
공공성을 내세우지만 그렇다고 상업성과 완전히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그리고 다소 어려운 정체성을 어떻게 그리고 왜 표방하게 된 것일까?
필자는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고, 답변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호기심을 표출하지 못하면 아마 죽는 병에 걸렸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Renate Comics를 이끌어가는 멤버 중 한 명이자, 언론 담당자로 있는 Peter Auge Lorenz 씨를 만나서 인터뷰했다.

 

Renate Comics 멤버 Peter Auge Lorenz 씨 인터뷰

Peter Auge Lorenz 씨

 

Q. 만화책이 가득 찬 책장의 모습을 바라만 봤는데, 그 속에 앉아있는 느낌이 독특하다. 이곳 Renate Comics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가게를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Renate Comics는 그래픽노블, 망가와 같은 만화부터 일러스트, 포스터, 디자인 등의 예술 작품까지 다양하게 판매한다. 하지만 우리 가게의 가장 첫 번째 기능은 이미 알겠지만 ‘만화책 도서관’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992년에 10~15명 정도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만화-예술 그룹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시간이 될 때마다 종종 만나왔고, 각자가 수집하고 소장한 만화책을 서로에게 소개하고 공유했다. 그러한 모임이 지속하면서 만화(Comic)가 중심이 된 혹은 만화로 가득 찬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일종의 북카페(Lesecafe)를 열어보는 것을 고민했지만, 그보다는 도서관(Bibliothek)을 만들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지금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문을 열었다. 그러다 1994년에 현재 있는 곳으로 옮겨와서 오늘날까지 자리하고 있다.

 

Q. 앞서 책장에 만화책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판매용이 아닌 건가?

책장에 있는 책은 판매용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보거나 대출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도서관 소장용 책이다.

가게 안에 걸린 팻말에 ‘만화책 도서관’이라고 쓰여 있다

 

Q. 책장이 꽉 차 보인다. 총 몇 권의 만화책이 있는지 궁금하다.

정확한 건 다시금 세어봐야지 알겠지만, 대략 2만 2천 권 정도 있다.

 

Q. 엄청난 숫자다. 이 많은 책은 어떻게 만화책 도서관에 꽂히게 되는 건가?

기본적으로 우리는 컬렉터이기에 오랜 세월 각자가 좋아하는 만화를 계속 수집해왔다. 그러한 책의 양이 꽤 된다. 그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그리고 다른 컬렉터나 출판사에서 기부를 받기도 한다. 최근에는 한 성 소수자 단체에서 퀴어(Queer)와 관련한 내용을 다룬 만화책을 후원 형식으로 받았다. 그러한 단체가 여러 곳이 있다. 이외에도 단체에서 지원금을 받기도 하는데, 그 돈으로 새로운 만화책을 구매하기도 한다.

 

Q. 만화책 구매와 수집에 일정한 기준이 있나?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만화라고 불리는 모든 것을 수집하려고 노력한다.

 

Q. 수집한 모든 만화가 도서관에 아카이빙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정 기준에 따라서 선별되는 것인가?

수집한 모든 만화가 도서관에 들어간다. 간혹 만화가가 자신의 작업을 직접 들고 오기도 한다. 만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달에 한 번 모임(Stammtisch)을 가지는데, 그 모임에 와서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 작업을 보고서 도서관이나 판매를 위한 진열대에 놓이기도 한다.

 

Q. 도서관의 책 분류는 어떻게 하는지도 궁금하다.

처음에는 아동과 성인으로만 구분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유심히 보니까 일본 망가를 읽는 사람은 꼭 그것만 읽더라. 마찬가지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영국 등의 특정 나라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만을 고집해서 읽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지금은 국가 및 언어별로 구분되어 있다.
이상적인 도서관은 이용자의 요구와 성향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웃음)

만화책 도서관의 아동용 섹션

 

Q. 도서관은 어떻게 이용할 수 있나?

도서관 사용 가능 카드를 신청하면 언제든지 대출할 수 있다. 카드를 만드는 비용은 1, 50유로이고 1년 이용비는 12유로이다. 책은 2주 동안 빌릴 수 있다.

도서관 사용 가능 카드와 신청서

 

Q. 반납을 안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경우는 신청할 때 적은 주소로 안내 편지를 보낸다. 다행히도 아직 그런 경우가 없다. 빌려 가는 독자들은 대부분 만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후에 빌려 갈 사람을 생각해서 책을 소중히 다룰 것이라고 믿는다.

 

Q.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크게 보면 Renate Comics의 공간 운영이 곧 도서관 운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 놓인 굿즈와 책 판매를 통해서 공간을 유지하고, 도서관을 운영한다.

 

Q.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나름의 활동을 하는 것 같던데, 그중에서도 자체적으로 매거진(Magazine)을 발행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일 년에 한 번씩 <Renate>라는 제목의 매거진을 자체적으로 발간한다. Renate Comics를 이끌어가는 멤버가 중심이 되어서 기획하고, 글을 쓰고 만화를 그려서 발간한다. 객원 필자나 만화가가 참여하기도 한다. 매거진은 매번 다른 주제를 다룬다. 주제는 다수결로 정하고, 그 다수결에 속한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서 진행한다. 최근 발행한 <Renate 43>에서는 음모론(Verschwörungstheorie)을 다뤘다. 꽤 어렵고 난해한 주제였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었다.

자체 제작 매거진 <Renate> 일부

 

Q. 만화를 그리는 수업도 있던데?

일종의 워크숍이다. 아동을 위한 수업과 어른을 위한 수업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업 내용은 크게 만화 드로잉과 이야기 창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에 한 권의 만화책을 완성하는 게 최종적인 수업 목표이다. 수업은 이곳을 함께 운영하는 멤버가 진행한다. 오랜 시간 만화를 그리고, 수집하고, 접한 전문가들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출판 결과물이 나오는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한다. 시간, 장소 그리고 비용은 홈페이지에 상시 업데이트한다.

 

Q. 독일 안에서도 Renate Comics와 비슷한 책방이 많이 존재하는 편인가? 말하자면 만화책 도서관을 운영하는 곳이 있는지 궁금하다.

만화(Comic)를 다루고 이를 중점적으로 아카이빙하는 책방과 도서관은 사실 많지 않다. 도서관으로 명명되는 공간에서 만화책을 대출해서 볼 수 있거나, 소장하는 곳으로 함부르크(Hamburg) 대학교와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 대학교가 있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다.

Renate Comics 추천 만화 섹션
카운터

 

Q. 오늘날 독립 서점과 독립 출판물이 하나의 유행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견이지만, 그 흐름 안에서 만화(Comic)는 다소 변방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Renate Comics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나? 혹은 기대하나?

이는 아무래도 용어가 가지는 범주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글과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전통적인 만화 형식을 생각한다면, 아직도 소수 혹은 마니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금의 현상 속에서 만화라는 개념 또한 일러스트와 그래픽까지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사실, 그런 환경이나 분위기가 어떻게 조성되고 흘러가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만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Renate Comics라는 곳이 만화를 좋아하는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지속해서 모임과 워크숍 활동을 이어 갈 생각이다. 그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이 주변을 보면 근사한 갤러리와 레스토랑이 많다. 특히 갤러리를 중심으로 일종의 메가(Mega) 비즈니스가 이루어지곤 하는데, 그런 분위기에 눌리지 않고, 지난 10년간 만화를 사랑해 온 것처럼 우리가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할 생각이다.

 

Renate Comics 홈페이지 

사진 이정훈

 

Writer

DNA Berlin 갤러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이후 독립 큐레이터이자 프로그램 기획자로서 활동하며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매달 한 명의 작가와 함께하는 <KUNST TALK>를 기획하여 운영했다. 현재는 국내의 오프라인 지면과 온라인 플랫폼에 시각 및 공연 예술을 주제로 한 글을 기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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